brunch

매거진 동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ica Apr 18. 2017

요술 치마

오른쪽으로 두번, 왼쪽으로 두번 돌면 된다구!

한남동 순천향병원이 생기기도 전부터 나는 그동네에 살았다.


지금도 있는 병원앞 약국을 따라 주욱 올라가면, 양 옆으로 리어카에 물건 파는 아줌마들이 계셨고 그 옆 어디메쯤에 엄마의 미장원과 아동복집, 그리고 구둣방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 더 들어가면 목욕탕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목욕탕 특유의 냄새가 문 열릴때 마다 솔솔 나는 그 골목을 오른쪽으로 돌면 언덕이 나오면서 오르막길이 된다.

그 길을  6살 계집아이의 걸음으로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찰 즈음 , 번듯하고 한적한 주택가가 나오면서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수시로 드나들며 놀던 친구의 집이 먼저 나온다.

우리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그 친구의 집을 끼고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우리 외할아버지 집이었다.

같은 한남동에 살았지만 그 친구는 부잣집 딸래미였고, 나는 아랫동네 셋방사는 미장원집 딸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윗동네 아랫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친구가 있을수 있었던 이유는 부자동네 사시던 외갓집 때문이었다. 엄마는 가난한 아빠와  연애결혼을 하고나서 같이 가난해졌고,  이북에서 오신 생활력 강한 할머니는 엄마를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했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육아의 공백을 엄마는 외갓집에 고스란히 의지했기때문에 나는 낮에는 외갓집에서 살고 밤에는 엄마 따라 셋방으로 돌아가는 이중생활을 했다.


외갓집 바로 밑에 살던 그 친구 이름이 지금은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나는 유치원 다녀와서는 항상 그 아이와 놀았다.

대문앞에 서서 큰 소리로 노래부르듯 , "@@야~~~노올자아아~~~" 하면  곧 대문이 열리고, 그 아이와 나는 마당에서 풀뜯고 주황색 돌을 모아다가 돌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서는  물에 휘휘 저어  물김치도 만들고 ,모래로 밥도 지었다.


우리는 너른 마당에서 자전거도 탔고,  그 아이의 오빠와 우리 외삼촌이 친구였으므로 우리는 노상 붙어서 노는, 말하자면 그당시의 절친이었다.

게다가 뒤늦게 할머니가 백일 치성을 드려서 얻은 귀남이 중의 귀남인 삼촌은 밥을 잘 안먹어 할머니 애를 태웠는데( 귀한 자식은 늘 입도 짧고, 몸도 약하다!)  하필 집에서는 밥을 안먹고 꼭 그집에만 가면 밥을 잘먹었다. 할머니가 그집에 쌀과 반찬을 정기적으로 팔아주고 우리가 그집에서 밥을 먹게했다는걸 나중에 알긴 했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그집에 자주 간다는건, 삼촌이 밥 한끼 잘 먹으러 간다는 뜻이어서 할머니는 그집에 놀러간다고 하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렇게  유치원 동문으로 지내던 우리는 어느덧 초등학생이 될 나이가 되었다.

봄이 되면 이제 학교를 가게 되었다며 어른들이 어깨에 매는 가방도 사주고, 옷도 사주며 큰 언니 되었다고 추켜세워주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당신은 번듯한 집에 사시면서 어린 나를 쪽방같은 셋방에 들여보내  재우는것을 너무나 가슴아파 하셨고, 첫손주인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 마음아픈것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답하듯이 내가 원하는 거의 모든것을  부족함 없이 다 해주셨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어디가도 기죽거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소공녀와 반대로 나는 낮에는 부잣집 손녀딸이었고, 밤에는 셋방살이 신혼부부 딸래미로 돌아갔다.



그날도 그 친구네 집에 갔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주신 것을 들고  자랑하고 싶었다.

 잘 어울려 놀긴 했어도, 평소에 지네집 부자라고 자랑하는 꼴이 쪼금 얄미웠었다. 나는 우리 할배 할매네 집도 부자라고 자랑했지만, 그 가시내가  "그건 니네집은 아니잖아~" 했던 말이 가슴에 분했던게 남았어서, 뭔가 자랑할 거리가 생기길 벼르고 있었다.  신나게 이거저거 보여주고 자랑질 하고 있는데 요놈의 가스나가 아무말도 안하고 샐쭉하니 있더니 나에게 입을 한번 삐죽거리고 한마디 내뱉는다.


"칫! 겨우 이따위꺼!"

 나는 자랑질을 멈추고 그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넌 뭘 가졌길래? 하는 눈으로 그 아이의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 아빠가 요술치마 사줬어! 흥!"

"뭐? 요..요술치마?"

" 그으래~~넌 그런거 없지?"

"거어짓말~! 너 거짓말이지. 세상에 요술치마가 어딨어?"

"흥!! 이 요술치마는 이렇게 입고, 이리로 두번 , 저리로 두번 돌고 사탕! 그럼 사탕이 치마아래 떨어져"

 

나는 할말이 없었다.

나는 ...졌다.


그리고나서 그 친구가 들고 와서 보여준 요술치마는 색깔도 고왔지만 치마 허리 부분에 무지개빛 고무줄로 되있었고, 기계주름이 착착 잡혀서 입고 돌면 정말 뭐라도 떨어질듯이 힘있게 펼져치던 주름치마였다. 입고 돌아보라고, 내 눈앞에서 요술 해보라 그랬지만 그 아이는 사람이 보고 있으면 안되고 혼자 방에서 해야된다며,  굳이 방에 가서 한바퀴 돌았는지 두바퀴 돌았는지, 사탕을 두개 들고 나왔다.


사탕도 ,학용품도,  오른쪽 왼쪽으로 두번 돌면 뚝딱 나온다는데......

나는 그냥 그날로 병이 났다.

자랑질이 먹히지 않은것도 분하지만, 그런 치마를 그 아이가 가졌다는것이 아니, 내가 못가졌다는것이 너무 속상했다. 내가 몇날 며칠을  징징거리고 요술치마 사내라고 땡깡을 부렸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기억속에 나는 할머니와 엄마를 양옆에 끼고 백화점으로, 시장으로 요술치마를 찾아 다닌 기억은 너무나 정확하게 난다.

그날의 할머니의 표정과 엄마의 말투, 심지어 나의 퉁퉁 부은 입도 생각이 난다.

백화점에 이어 시장을 돌던날, 어느 가게에서 그 친구의 치마와 거의 똑같은 무지갯빛 고무줄 허리 밴드에 기계주름이 잡힌 치마를 찾았다.

할머니와 장사하시던 아줌마, 그리고 우리 엄마 셋은 콩만한 나를 가운데 세우고 설득에 설득을 했다.

"이거 요술치마에요?"

이 난데없는 나의 질문에 뜨악해 하던 아주머니 눈길은  할머니의 복화술에 멈추면서 세 여자들은 나를 두고 집에 가서, 밤에, 돌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집에왔다.

때는 밤이었으니, 혼자, 입고 ,돌았다.

두번 돌고 다시 두번 돌고, 백번 돌아도 요술은 안부려졌다.


나는 그 이후로 그 친구집에 놀러가지 않았다.  우리집이 진짜 이사를 해서 이기도 하지만  끝끝내 그 치마가 요술치마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그 친구가 너무나 얄미워서 같이 놀기 싫었다.

친구가 내가 부러워 (?) 아니면 내가 얄미워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나를 달랬었다.

그 말이 이해가 되고 그 상황이 눈에 보이게 된건 한참 뒤의 일이지만.

그리고 이제  분하디 분했던 그 사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그때의 심각해 죽던 내 자신과, 그 친구의 표정과 시장에서 정말 통사정 하듯 나를 달래던 할머니와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는 다른건 다 잊었지만, 그 친구의 집, 그 친구와 놀던 소꿉놀이,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던 어린  나와 그 친구가 아직도 올곳이 기억에 남아서, 그 아이가 보고싶다.

왜냐면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긴 주름치마를 보기만 해도 그때의 내가, 그때의 그 아이가, 그때의 당황해하면서도 웃음을 띄우던 젊은 할머니와 곱던 엄마의 얼굴이 연달아 생각나기때문이다.


그 아이도, 나처럼 그런 치마를 보면  한번쯤 나를 생각할까? 그때의 우리들을 추억할까?


보고싶다. 참 그립다.

요술치마로 나를 안달나게 했던 그 가시내.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