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꿈을 꾸던 어린 시절에는..
수리 중인 차 때문에 발이 묶인 아들을 태우고 다운타운까지 가는 길이었다.
봄바람 같은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
"엄마는 어릴 때 꿈이 있었어?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라고 아들이 물었다.
"꿈? 응... 엄마는 꿈이... 현모양처였어. 한국말로 참 좋은 엄마, 참 좋은 와이프가 되는 게 엄마 꿈이었어"라고 현모양처의 뜻을 쉽게, 쉽게 풀어서 대답을 해준다.
현모양처.
그 멀고도 험한 단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면.
초등학교 5-6학년 때 앙케트 질문집을 만들어 돌려 답을 쓰며 놀곤 했을 때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꼭 나는 현. 모. 양. 처라고 썼다.
뜻은 현명하고 어진 어머니, 좋은 처이지만, 읽기로는 현모양처로 읽고 내가 생각한 뜻은 돈은 남편이 걱정 없이 벌고 집안단속과 살림을 야무지고 예쁘게 하는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땅 짚고 헤엄칠 일, 그냥 있어도 나이 들면 저절로 될 일에 장래희망까지 걸다니 참 꿈도 소박하다고 혹자는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적 읽었던 신사임당 전기에서 나는 가정을 지키는 여자의 힘이라는 건 한 나라를 바꾸는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표면적으로는.
속으로는.... 바깥일 안 하고 집안에서 신사임당처럼 훌륭한 자식을 키워내고 싶은 자식에 대한 허영과 돈걱정 안 시키는 양반 같은 명예로운 남편까지 기본 조건으로 꿈꾸었으니 이미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꿈이기도 했다.
그 꿈은 늘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서 그렇게 기본적으로 살림과 육아에 충실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안정된 사람을 남편감의 첫째 조건으로 생각하고 결혼을 했는데, 꿈을 이루는 일에는 역경이 따르기 마련인지 내 마음을 흔들고 눈을 감고 싶도록 하는 일들은 결혼 후에 연달아 일어났다.
마치, 네 장래희망이 “ 현모양처” 였다며~?라고 비웃듯이.
꿈은 그래서 꿈으로 끝나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한낱 꿈으로 치부하고 현실적이 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엄마, 좋은 아내의 역할을 흉내라도 내기 위해 나름 발버둥 치고 애를 썼다. 왜냐면.. 그게 나의 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구멍 난 바가지에 새는 물처럼 “현모양처”는 자꾸 바닥을 보이며 사라졌고, 나는 그냥 오늘날 때때로 보통의 엄마 , 수시로 보통도 못 되는 경계를 드나드는 여자가 된 것이다.
현모양처라는 단어의 하릴없이 순수한 뜻을 들은 아들이 다시 묻는다.
“ 진짜? 진짜 그게 꿈이었어? “
마치 장난하느냐는 표정이다.
“ 엄마는...... 살다 보니... 꿈이 바뀌어서.. 어떤 엄마가 되고 싶었냐면.... 나는 너의 모든 걸 기억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어.... 너한테 네가 뱃속에서 이렇게 놀았었고,. 네 태몽 꾼일, , 일 학년 학교에서 있었던 일, 네가 처음 이빨 빠진 일... 그거 하나도 중요한 거 같지 않을지 모르지만, 엄마는 할머니가 엄마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말해줄 때 참 행복했었거든.. 나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해서 말해주는 엄마가 있다는 게 참 좋았었어. 나도 너에게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어.. 네게 있던 일들 다 아는 엄마, 네가 기억 못 하는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어. 그게 너를 낳은 후 내 꿈이었던 거... 같아.”라고 말했다.
아들은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꿈에 한창 부푼 20대 초반 남자인 아들이 어떻게 내 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 아이의 일상과 아이는 기억 못 할 시시콜콜한 유년기를 기억하고 기뻐해 주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였다.
내가 나의 엄마로부터 받았던 가장 끈끈한 것.
버텨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아주 뒤늦은 후였다고 해도.
그것이 수시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던 나를 매어준 끈이었다.
나로 인해 세상에 온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주 처음을 기억해주고 함께 지켜보고 성장한 시간들이 내 꿈이 되고 다음날의 희망이었으며, 오늘까지의 인생으로 채워진 것이다.
나는 현명하지 못한 때가 훨씬 더 많은 보통의 사람이다. 보통이라는 말도 과분하도록 평균적이지도 못한 사람이다.
미련하기가 넘쳐서 현명해지기를 꿈으로 소망하는 게 격에 맞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어느새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 낳고 십 년 강산이 두어 번 바뀌는 동안 왜 내가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었는지 깨달았다.
야단치고 , 소리 지르고 , 실수하고 , 부족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나는 그 한순간도 놓치면 이룰 수 없는 그 꿈 때문에 마음의 탯줄로 애들과 나를 묶어 함께 꿈꾸며 오늘에 이르렀나 보다.
나는 아이들의 태중 초음파 사진과 말라버린 탯줄, 진료기록과 빠진 치아들, 육아일기와 그들의 흔적들도 최대한 추려 보관해왔다.
그 역할 , 그 자리, 그 매일의 꿈이 아니었다면 오늘까지 나를 지탱하기 어려웠으리라.
지난겨울 오랜만에 한국을 혼자 다녀와보니, 그 사이 다 자란 아이들은 각각 서로 도우며 잘 지내고 있었다.
내 부재의 시간들에도 이제 엄마의 빈자리와 역할을 서로 채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걸 알고 난 내 마음은 홀가분하면서도 뭉클했고, 기쁘면서도 눈물이 났다.
여태껏 매일 분량의 꿈을 이루며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기억하려는 엄마로 살다 보니 , 현모양처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꿈은 수준과 상황에 어울리게 조절되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세월 지키키., 자리 지키기..
그게 젤 힘들지 싶다, 훌륭할 것 없는 보통내기 엄마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