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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Aug 29. 2016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울게요

그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들의 추억


내 생애 첫 편지를 받은 기억은 초등학교 일학년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날이었다.

오전반 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던 때에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소리도 우렁차게 엄마를 부르며 들어간 집에는 엄마 대신 안방에 자그마한 밥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오면 바로 엄마를 찾아 방으로 들어올거라 생각했나보다.

고요한 집안에 , 따순 기운이 스며든 그 방안의 밥상위에는 엄마가 딱지처럼 접어놓은 편지가 있었다.

학교 잘 다녀왔지? 우리 딸 수고했어..
엄마가 우리딸이 좋아하는 명란젓 사왔으니 밥 맛있게 먹고 있어. 엄마 금방 볼일보고 올게. 알겠지? 우리 착한딸 .


난 이 별 큰 내용없는 메모를 , 갓 깨우친 한글 실력으로 떠듬떠듬 단어먼저 소리내어 읽고 다시 한번 뜻을 헤아려 읽으면서 밥을 먹었었다. 그리고 밥을 다 먹었을 즈음, 배가 불러 울컥 치받힌건지 아니면 적막감에 눌려 그랬던 건지 그냥 눈물이 하염없이 나서 울어버렸다.  소박하고 따뜻한 엄마의 글씨가 꼭 엄마같이 느껴져서, 글씨가 엄마의 목소리가 되고, 편지를 썼을 엄마의 손길이묻은 종이는 그냥 엄마의 분신 같은 생각이 들어서 행여 엄마가 집에 서둘러 오다 사고가 나면 어쩌나, 과연 엄마가 금방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내 감정에 못이겨 울었던것 같다.  

이게 내 생애 처음 받은 편지의 기억이었다.


그 이후 나의 편지 역사의 명맥은 매해 연말 근처 즈음에 꼭 써야 하는 국군아저씨 위문편지가 이었고, 나는 알지 못하는 "아저씨" 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릴때는 어린맛에 쓰라면 쓰는줄 알았지만, 나이들어가며 고학년이 될수록 유독 한두명에게는 꼭 답장도 있건만 내 편지는 시종일관 일방통행이었으므로 나는 숙제를 하는 듯한 의무감으로 편지지를 채웠던걸로 기억한다.



이후 또다른 추억은, 편지는 아니지만 해외출장이 흔치 않던 시절에 여행업에 종사하시던 아버지가 출장을 가실때마다 현지에서 보내주신 엽서들을 받는것이었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크나큰 자랑이자 자부심 드높이는  엽서 이상의 역할이었었다.  우리 옆집 살던 구둣방 기집애나, 약국집 아들래미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때깔도 화려한 엽서들이 때론 아버지가 도착 한 후에 배달이 되었을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들고 온 동네 다니며 자랑질을 하곤 하던 , 내 어린시절의 남다른 편지에 대한 추억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출장 가방을 엄마가 챙기시는 날부터 돌아오시는 날까지 나는 정말 소풍을 앞둔 것 보다 더한 설렘과 자랑스러움으로 기쁨에 들떠 있었던거였다. 왜냐면 아버지 출장 가방은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그림엽서로 시작해서 , 돌아오시는날 김포 공항으로의 마중 나들이와 그곳에서 아버지가 나오시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나에게 하사되는 공항 스낵바의 소프트아이스크림으로 이어지는 달콤하고 특별한 여정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엽서는 내가 점점 커갈수록 동생들에게 혹은 뭉퉁그려 삼남매 이름과 엄마까지 함께 묶여지더니,  언젠가부터 아부지는 빈엽서를 기념선물로 가방에 넣어 돌아오셨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문방구에서 파는 알록달록 색깔도 디자인도 너무나 이쁜 편지지들을 사모으면서 꼭 할말이 없더라도 공부대신 '편지질'--공부 하는줄로 생각하고 기특해하다 편지쓰는것이었음을 알고 난 엄마는 아주 치를 떨며 '질' 이라는 접미어에 강세를 두셨었다--을 하는게 취미였으므로 , 편지를받을 사람보다는 쓰는 내 자신이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심취하게 되었던 .. 편지쓰기에 열과 성을 다 하던 때였다. 실로 그 양이 엄청났기때문에 내가 준 편지의 양과 대상을 기억할수 없으나 , 친구들에게서 받은 편지의 갯수와 그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는 아마도 일기와 작문숙제와 국어공부는 편지쓰기로 대치가능한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 편지쓰기 생활에 정점을 찍었던때는 첫 연애편지를 받기도 했었고, 또 내가 좋아하던 남학생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던 사건이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어스름한 하교길 ,계단 앞에서  어느새 내 손에 쥐어진 편지는 나를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하던 아버지의 엽서와는 다른,   정신이 멍해져서 땅위를 걷는지, 구름위를 걷는지 모르겠는 희안한 기분을 갖게 하는 거였다. 비록 그 편지의 내용이 내가 기대한것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우짜든둥, 돌아보건대 나의 편지 역사는 대충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끝나는듯 보였다. 편지로 일일이 생활을, 마음을 알리기에는  인내심이 없었고, 유학생활에서 다급해지는건 그저 금전문제만 있었던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전화로  모든걸 하게 된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편지가 오고 갈때 즈음이면, 나는 슬펐다가도 다시 기뻐졌을것이고, 보고팠다가도 금새 잊고 내 상황에 그리움이란것도 묻어버렸을것이며, 한국이 그리워 미치겠을 때는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무한반복하며 떡볶이나 라면 한 그릇으로 해결했을 것이므로 어느새 편지는 점점 멀어지고 잊혀진 취미가 되어버린것이다.

설상가상 , 테크놀러지라는것은 점점 발달하여 우리들에게 펜을 들어 손글씨를 쓰도록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고작 요즘들어 우리가 펜을 들어 쓸일이라고는  조마조마하게 떨리는 계약서의 서명이나-- 내이름 내가 쓴 사실이 행여 손해로 돌아올까봐--혹은 각종 관공서에서의 법적인 서류에 이름을 쓰는  일 뿐인것이다( 이것도 떨리고 부담되긴 대략 마찬가지다)


요즘 가끔씩 내가 쓰는 편지들은 생일 카드일뿐이고, 때로 그위에 쓰는 글씨들이 참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그럼에도 , 글씨는 참 그 사람과 닮아 있는 그 사람의 체취고 향기이다.  그래서 그 편지의 내용보다도 때로 편지를 쓰느라 고개를 숙였을 그  숨결이, 체취가 , 그리고 글씨의 모양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요즘 내가 받는 편지는 아들과 딸에게서 받는 알아보기도 힘든 한글과 영어로된 것들이지만,

내가 전에 취미처럼 쓰던 편지들과는 비교할수 없게 짧고 의례적인 내용들이지만,  그래도 애들이 주는 그 편지는 내가 받았던 엄마의 첫 편지처럼,  자랑스러웠던 우리 아부지의 엽서처럼, 설레이던 첫 사랑의 편지처럼,  여전히 귀하고 또 귀하다.

손글씨에는 숨결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글씨를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편지지를 사러 가야겠다. 그리고 바로 근처의 카페로 가서 편지를 쓰리라. 여전히 저 바다 너머 작은 땅에 계시는 내 부모와 어릴적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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