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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모니카 Jan 28. 2021

그래도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야.


필드 트립 가는 것처럼 일정과 예산이 내 손에 가족여행.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세부 일정은 정하지 않았지만, 블라디-하바롭 구간의 왕복 열차 티켓을 예매한 것과 각 지역에서의 숙소를 정해놓은 것 만으로도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우리는 시내에서 시락국밥을 먹고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3명이 함께 떠나는 첫 해외여행은 어색했지만, 설렜고 행복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남편은 아이에게 몇 가지 러시아어를 가르쳐주었다. 간단한 거 "까끄 받 자붇?(이름이 뭐야?)", "미냐 자붇 루초(내 이름은 루초야)", "하라쇼(좋아요)" 등이었다. 그러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종착지가 블라디보스토크 역인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몇 정거장을 거치며 이동하는 동안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간판, 안내문은 모두 러시아어로 표기되어 있었고, 심지어 방송까지 러시아어로 흘러나왔다. 익숙한 영어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헐...' 다행히도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하였다. '휴.. 다행이다.' 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하바롭스크행 기차는 밤 10시 50분 출발이었고, 우리에겐 약 4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역에 짐을 맡기고, 저녁식사도 해결할 겸 역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항공권 프로모션을 하던 때라 그런지 한국인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국내에 소개된 맛집이나 카페, 화려한 식당가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많이 가지 않는 허름한 현지 식당에 들어갔고, 러시아 현지 음식을 먹었다. 익숙한 맛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고, 아이도 오물오물 거리며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저녁을 먹고 나니 거리는 어두웠다.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하는 지역, 특히 밤거리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편이라 밤엔 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다. 특히 이번 여행은 지역 공부를 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온 터라 밤이 되자 약간 무서워졌다. 영어가 통용되지 않는 것과 내가 아는 러시아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식당을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자니 9시가 넘었다. 우리가 지나는 길에는 한국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낯선 거리가 더욱 낯설게 다 나왔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식사를 하고 역으로 이동할 때도 걸었다. 길은 어두웠고, 가로등은 밝지 않았고,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술냄새를 풍기는 풍채 좋은 남자들이 지나가 거나했다. 난 긴장했지만 아이도 긴장할까 봐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 남편과 함께 역으로 향했다. 


역사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대합실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는 사람들,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사람들, 아님 멍하게 생각에 잠긴 사람들. 우리는 빈자리에 앉았고, 4살배기 아이는 거기서 갖은 애교를 부리며 역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할 열차의 출발 정보가 올라왔다.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가 우리가 타는 기차를 타는 건지, 플랫폼에 내려가는 사람은 꽤 많았다. 플랫폼에 내려가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를 앞에 두고, 러시아어만 가득 적혀있는 티켓을 들고.. 멍해졌다.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우리 칸이 어딘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우리가 타야 할 기차 칸은 어디인 거야?' 문의를 하려고 “익스큐즈 미“를 여러 번 외쳤지만, 사람들은 힐끗 쳐다볼 뿐 자기의 갈 길을 갔다. 헐... 


"줘 볼래?" 갑자기 남편 내 티켓을 가져갔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승무원에서 달려갔다. 그리곤 "이 쪽으로 가면 된다!"며 나에게 손짓을 했다. “모니카, 여기서 오른쪽 방향으로 3번째 열차,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2번째 칸이야. 이리로 오면 돼 “ 아 맞다. 남편이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던 것이 생각났다. 남편은 우리를 인솔했고, 열차가 출발하기 전 안정적으로 우리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열차는 10시 48분에 우리를 하바롭스크에 내려주었다. 하바롭은 블라디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더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 이곳만 시간이 약간 늦게 가는 듯 마음이 평온했다. 파일을 꺼내 숙소 정보를 확인한 후 숙소로 향하는 트램을 기다리며 남편을 보았다. 내가 숙소 정보를 들고 이것저것 확인하는 동안 남편은 캐리어 두 개를 길가에 세워두고(아기 물품, 여행 소모품/일간의 아침식사_햇반, 레토르트 국물, 아기 간식, 반찬, 라면, 라면포트 등), 아들과 놀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신혼여행 때의 앙금이 몇 년이나 지속되었는데... 하마터면 기차를 못 탈 뻔한 그 순간 백마 탄 신사처럼 우리를 안내해 준 그에게 따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야.'      


(왼쪽) 기차에서 우리의 아침식사 상행 열차에서는 조식이 제공되지 않았다. (오른쪽) 잘자고 깨어나 멍때리고 있는 아들 ♡
(왼쪽) 여행 떠나기 전날 밤 아들에게 우리가 가는 지역을 설명해 주는 남편, (오른쪽) 티켓 확인하는 남편과 2리터 생수를 들고, V하는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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