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하늘부터 살폈다. 해가 좀 비추는 듯싶더니 구름이 많고 점점 흐려졌다. 아무래도 우기가 꽤 긴 모양이다. 화창한 날씨에 기지개 켜면서 하루를 맞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다.
며칠 전부터 발현산으로 가는 길을 걷고 싶었다. 설마 비는 안 오겠지 싶어 집을 나서 보기로 했다. 엄마가 어젯밤 맛있게 무쳐둔 파김치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는 대강 필요한 것 몇 가지만 챙겨 나왔다.
순례자들이 많이 빠져나가 한산해진 길이 여유로웠다. 비를 듬뿍 맞은 푸른 잎은 더 푸르렀고, 피리같이 맑은 새소리는 더 정다웠다. 아직 굳지 않아서 약간 질퍽한 땅에선 걸을 때마다 흙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제 때 꺽지 않은 푸른 고사리들은 키가 훌쩍 컸고, 이름 모를 들꽃들은 작고 귀엽게 피어 넓은 밭을 이루고 있었다. 발현산 가는 길은 우리들만의 초록빛 산책로였다.
산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비가 내렸다.
잠깐이겠지 하면서 그냥 맞고 걸었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마침 블루하우스 근처였다.
블루하우스는 성모님을 목격한 발현자 중 한 명인 비츠카의 집인데,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어 블루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며칠 전엔 단체가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사람이 없어 보였다. 돌계단 몇 개를 올라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 현관문에 들어섰다. 성모님을 보고 있는 비츠카의 그림이 맞이해준다. 그림 왼쪽에 있는 방에 들어갔다. 제대에 예수님, 성모님 상이 모셔져 있다.
아기 예수님도 계셨는데, 투명한 아크릴로 만든 상자에 모셔져 있었다. 이 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들이 가득했다. 루칠라가 배낭에서 기도를 부탁하신 분들의 편지를 꺼내 봉헌했다.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잠깐 기도하고 나가려는데 비가 영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좀 더 앉아 있다 가기로 했다. 잠깐이지만 침묵 중에 기도하는 이 시간이, 지붕에 빗물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
블루하우스 앞 풍경
빗소리가 줄어드는 것 같아 나가 봤는데 아직이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나가기로 했다. 화장실도 들를 겸 발현산 앞 카페까지 비를 맞으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추운 날씨에 몸 좀 녹일까 싶어서 커피를 시켰다.
하... 커피가 미지근하다.
집에서 뜨끈하게 끓인 물 한 잔이 간절했다. 그래도 시켰으니 어쩔 수 없어 단숨에 마시고는 후딱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행히 비가 좀 그쳤다. 카페를 나와 발현산 청십자가 앞으로 올라갔다. 돌이 미끄러웠다. 서로 조심하라고 옥신각신 이야기하며 성모님 상 앞에 올라갔다. 한 오 분도 안될 텐데 산을 전부 오른 기분이다. 비가 왔는데도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발현산.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장소라고 해서 발현산이라고 불린다.
우리도 조용히 나무 밑에 서서 묵주기도를 드렸다. 성모님의 사랑 가득한 미소, 하늘 가득 맑고 청아한 새소리, 아직 덜 익은 무화과들이 열린 나무들, 흙이 씻겨나간 매끈한 돌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잦은 비에 우비를 입고 또 우산을 쓴 채로 조용히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무얼 위해 기도하고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어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어쩐지 우리에게 던져질 질문 같지만.
'아직 채 열지 못한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아리고 쓸쓸하기만 해서, 자칫 건드렸다간 준비 없이 막 쏟아져 나올 아픔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무작정 떠나왔다.
그리고 이 곳에 와 있다.'
답한다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아직 덜 익은 초록빛 무화과
묵상한단 명목으로 젖은 돌멩이도 마다하지 않고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앉아있지만 사실 머릿속 잡념이 한가득이다. 후.... 다시 조용 눈을 감았다. 들리는 소리도, 우리를 스치는 것들도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지고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조금은 애썼지만 ㅎㅎ), 힘주어 노력하지 않아도 평화란 단어가 슬며시 마음 한편에 들어와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잔잔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숙소까지 걸어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아예 성당으로 갔다.
일찌감치 미사 준비를 하고 야외벤치에 앉았다. 비 온 뒤라 추웠지만 몸도 맘도 편안하게 미사 드릴 수 있는 곳이 좋았다. 조금씩 날씨가 개이기 시작했다. 미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엄마가 급하게 손짓을 하시며 뒤쪽을 보라고 하신다.
오! 무지개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제 어디서나 보물 찾기처럼 무지개를 잘 보시는 우리 로사 맘. 오늘도 역시나였다. 매번 느끼지만 참 신기하다. 무지개를 보고 행복해하시는 엄마 덕분에 우리도 덩달아 기분 좋게 미사를 드렸다.
까만우비 입은 로사맘 그리고 빨간 우비 입은 루칠라
너무 추워서 온 몸을 덜덜 떠는 바람에 어떻게 미사를 드렸는지도 몰랐지만 마음만큼은 비 개인 화창한 오후같이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