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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모니카 Oct 19. 2020

영혼의 찜질방


오후 4시부터 비 소식이 있길래 오늘은 오후 12시 미사를 드리러 나가기로 했다.(보통은 매일 오후 6시 국제 미사를 드린다)

일요일 아침에는 이 곳으로 주일을 보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야고보 성당 주변이 활기찼다.

​성당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밖으로 다시 나와 잠깐 벤치에 앉았는데 하늘색 스프라이트 무늬의 시원스러운 셔츠를 입고 계신 아저씨께서 갑자기 말을 시키셨다.


"야고보 성당에서는 로아티아어 미사가 시작됐고

저~쪽 강당에서는 영어미사가 시작될 거예요!"

 

그러고는 우리 보고 강당 가서 영어미사를 드리라고 한다. 깜짝 정보를 알려주신 아저씨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곤, 바로 강당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도 인산인해였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야외벤치에, 우리는 강당 뒤쪽에 서서 미사를 시작했다.


      주일 오후 12시 영어미사가 드려지고 있는 강당의 모습


강론이 시작될 때쯤, 엄마가 앉아계신 벤치로 나왔는데 크로아티아어로 화답송을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야고보 성당에서 드리고 있는 미사가 야외 스크린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우리는 영어미사를 뒤로 하고
야외 스크린 쪽으로 갔다.

​이상하게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매일 듣고 있어서 그런지 크로아티아어가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한 자리에 두 언어로 동시에 드려지는 미사라니!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야고보성당 밖에서 영성체를 하고 있는 신자들


신부님 *강복을 끝으로 미사를 마치고 성당 주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강복이란?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심을 뜻한다. 미사나 신자들의 모임을 마칠 때 사제는 신자들을 향해 십자 성호를 그으며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하느님의 강복을 빈다.)

우리기 찾은 식당 이름은 토마토.

이름부터 맛있는 이 곳은 한 끼에 3-4유로 정도로(한화로 약 4-5천 원) 저렴하고 맛이 좋다. 특히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불에 그을린 향과 맛이 끝내준다!

여기 감자는 우리나라보다 퍽퍽하다. 먹고 나면 뱃속에 켜켜이 쌓이는 것 같아 소화가 잘 안돼서 먹기가 꺼려지는데 여기선 감자마저 맛나게 먹었다. 심지어 튀긴 감자였다!

​언제나 그랬듯 식후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깔끔하게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소성당으로 향했다.







소성당 입구


'성체조배 소성당'으로 불리는 이 곳은 오전 내내 각국의 미사를 봉헌드리고, 오후에는 개인적으로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제대에는 램프 모양의 초 하나가 조용히 타고 있었고, 감실 앞에는 작은 성체가 모셔져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성체를 향해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감동이었다.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린 후 중간쯤 앉아 성체를 바라봤다.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에 편안하게 잠든 아기처럼 이 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을 맡겼다. 고요한 가운데 점점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감미로운 휴식을 취했다.  

나라와 인종이 다르고, 성격과 가치관, 생각이 다르지만 모두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살던 우리 집은 학교와 꽤 거리가 있었다. 걸어서 40분쯤 걸렸다. 엄마는 아침에 등교할 때 성당에 들러 하느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가라고 하셨다.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중간에 꼭 성당을 지나쳐야 했는데, 엄마는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학교를 가듯 하느님께도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당부하시곤 하셨다.

우리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늘 학교 가는 길에 성당에 들렀다. 우리 자매의 성체조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묵상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체조배는 그저 하느님께 안부 인사드리는 것이었다. 가끔 지각할 때면 바람에 날리듯 고개를 휘저으며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학교로 달려가긴 했지만 ㅎ

방과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도 역시 성당을 지나야 했다. 성당엔 커다란 마당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미리 마중삼아 마당에 앉아 계시면 우리는 엄마를 따라 성당에 들어갔다. 아침에 채 드리지 못한 안부인사 대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듯 쫑알쫑알 중얼거리곤 했다.


우리에게 성체조배란 우리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줄 것 같은 아주 편안하고 다정한 할아버지와의 만남 같은 것이었다.

훌쩍 큰 어른이 되어 머나먼 땅 메주고리예 성당 안에 머물렀던 성체조배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품에 꼭 안기는 것처럼.



조배를 마치고 소성당을 나서는데, 루칠라와 동시에 후~하고 큰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뽀얘지고 마음은 한결 더 포근해진 것 같았다.

루칠라가 말을 건넸다.


언니~영혼의 찜질방에 다녀온 것 같아!



들여다보기 힘든 우리 영혼의 깊은 곳,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저 깊은 곳까지 평온함이 깃든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기상예보가 잘 맞는다.


매일 봐도 예쁜 길가의 꽃들을 보며, 지팡이 삼아 썼던 우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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