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여행지는 공항

by 예모니카


매일 책상과 씨름하며 공부해도 모자랄 고3 시절 하루아침에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가까운 지인분들께서 가족단위로 동유럽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우리 집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어떤 고마우신 분께서 나라도 다녀오면 어떻겠냐며 선뜻 비용을 내주신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회가! 수능을 코앞에 둔 입시생이었으니 당연히 선생님들의 만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는 다녀오라며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 방학식도 빼먹고 나는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가 보는 공항.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또 도착하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하기도 하고 살짝 겁도 났지만 가슴 터질 듯 차오르는 설렘에 발걸음만큼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버스에서 내려 공항 입구에 섰을 때 그 오묘한 긴장감이란. 어찌나 떨리던지.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세상 바쁘게 오고 가는 길에 고개를 들면 여기저기 보이는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안내문구들. 여기가 내가 알던 한국이 맞는지 순간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깨에는 힘이 바짝. 얼굴은 살짝 경직된 채로 인솔자 아저씨 뒤를 졸졸 따라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진짜 공항이구나. 정말 깜짝 놀랐다.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가히 미래도시였다. 여러 조명에 비친 세련된 인테리어는 은빛 찬란한 도시였고, 나는 이 한가운데에 서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행성을 탐험하러 가는 호기심 가득한 우주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상상의 나래를 마음대로 펼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떠난 나의 첫 유럽여행. 15박 16일 동안 누렸던 아름답고 신비한 풍경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지만 입에 짝짝 붙었던 맛 좋은 음식들. 보는 것마다 먹는 것마다 매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혼자 온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더 보고픈 마음에 잘 때면 살짝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언젠간 꼭 지금 여행한 곳곳을 가족들과 함께 오리라,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십 대의 마지막 꿈을 지닌 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8월 7일, 귀국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수속을 마치고 귀국장에 들어서니 저 멀리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동생과 고개를 기웃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 엄마. 누가 보면 몇 년 떨어져 있었던 거 마냥 나는 엄마와 동생을 보자마자 와락 안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도 잘 먹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얼굴을 보시고는 에구. 잘 다녀왔구나 하시며 그간 걱정했던 마음을 내려놓으셨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며 작은 상자 하나를 내미셨다. 상자를 열어 보니 팔찌가 들어있었다. 눈물에 어른거려서인지 유난히 반짝였다. 엄마는 내 팔에 쏙 맞게 채워주시고는 예쁘네.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 먹자며 서두르셨다. 귀국장에서 맞았던 생일, 꿈이나 꿨을까. 그렇게 긴장감 가득했던 나의 첫 공항은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후 나는 가끔 여행의 추억이 그리워질 때면 제일 먼저 공항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설프기만 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나곤 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잘 살다가도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면 무작정 공항으로 달려갔다. 일부러 출국장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마냥 설렌 표정, 나 못지않게 긴장한 얼굴 등 다양한 표정과 감정이 담긴 사람들을 통해 언젠가 가보고 싶은 미래의 여행지를 떠올리며 상상여행을 했다. 향기로운 커피만큼이나 감미로웠다.


시간이 많이 흘러 감사하게도 여행의 기회가 닿을 때면 엄마와 동생과 함께 혼자 여행했던 곳들로 여행을 떠나며 고3 시절 나의 꿈을 하나씩 이뤄나갔다. 우리 가족만의 추억이 쌓여갈수록 나는 처음 마주한 미래의 도시 속 어린 탐험가에서 이제는 제법 탐험을 할 줄 아는 진짜 여행가가 되어갔다.


언제나 여행의 시작은 공항이었다. 실수하진 않을까. 빠진 건 없을까. 무슨 일은 없겠지. 갖은 염려와 걱정들로 내내 긴장하는 시간들조차 싫지 않은 마법 같은 공간. 똑같은 밥을 먹어도, 매번 마셨던 차 한잔을 마셔도 유난히 맛있어 머무는 시간만으로도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곳. 그래서 공항을 떠올리면 언제 어디서나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에서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아쉬움만 하루하루 쌓여간다. 여행했던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 그리움을 달래 본다. 어디를 가든 여행의 시작이자 마침표인 공항은 설렘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추억의 앨범이다. 마음처럼 달려갈 순 없지만 언젠간 미래의 여행을 꿈꾸고 그 꿈을 이뤘듯 이 위기를 잘 이겨내고 공항으로 달려가 새로운 여행의 첫 발자국을 찍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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