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푸른 눈의 아버지

벨기에 브뤼셀을 다녀가다

by 예모니카


이른 아침 힘차게 달리는 기차 안,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아직 잠이 덜 깬 찌뿌듯한 몸이 슬슬 기지개를 켠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이제 곧 있으면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지. 온통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어릴 적 우리가 살았던 동네엔 반짝이는 푸른 눈을 가진 신부님께서 살고 계셨다. 우리 집은 윗동네, 신부님은 아랫동네. 마주치면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신부님은 매일 저녁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을 하셨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산책길에 우리 집에 들러 기도를 해주셨다. 아마도 우리 집 사정을 알게 되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매일이 멀다 하고 술에 취해 온 동네를 누비시는 아버지. 당연히 모를 사람이 없었다. 학비는 물론 매일 생활비에 쪼들려 살았다. 아버지께서 난동을 피우거나 소란스러워지면 집에서 도망쳐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다 신부님께서 오시면 종일 불안함으로 두근대던 가슴이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곤 했다.


신부님은 벨기에분이셨다. 가끔 초대를 받아 신부님 집에 놀러 갈 때면 냉장고에서 벨기에 초콜릿을 꺼내 동생과 내 손바닥에 꼭 하나씩 놓아주셨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달콤함에 상처 난 마음이 살살 녹았다. 신부님은 오르간을 즐겨 치셨다. 악보도 없이 즐겁게 흥얼거리시며 즉흥으로 연주해주시곤 했다. 내가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신부님께 말씀드렸을 땐 누구보다 기뻐해 주시며 즉흥으로 작곡하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신부님의 연주를 들을 땐 천국이 이런 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에 감동하기도 했다.


한참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 집 사정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지금 빨리 택시 타고 우리 집에 오세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던 일도 멈추고 달려갔다. 신부님께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신문지로 돌돌 말은 뭉치 하나를 내미셨다. 학비를 내라면서.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려운 형편에 기술 배워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공부를 한다며 손가락질을 해오던 때, 오히려 공부해야 한다면서 학비까지 도와주시는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에 울컥했다.


신부님은 늘 내가 술 드시는 아버지를 이해하길 바라셨다. 힘든 노동을 하고 나면 목에 먼지가 많이 쌓이기 때문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면서 씻어내야 한다고,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매일 상처만 쌓여가는 어린 마음에 신부님 말씀은 위로였고 살아갈 힘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여전히 현실에 쫓겨 바쁜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부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침대에 누워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계신 신부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미 정신까지 흐려질 정도로 위독해져 나를 못 알아보셨다. '신부님 저 왔어요. 저예요.' 신부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울음을 참으며 말씀드렸다. 갑자기 신부님께서 막 우시면서 손을 떠셨다. 나를 알아보신 듯했다. 신부님도 나도 엉엉 울었다. 이 날이 신부님께 드린 마지막 인사였다.


재작년 겨울, 신부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나는 주저앉았다. 한 번쯤은 생활이 나아져서 이제 걱정 없이 잘 산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직 힘들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미주알고주알 드릴 말이 많았다. 신부님을 떠나보내드리기가 힘들었다. 나는 한 동안 울었었다. -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둔 숙소를 찾아 짐을 두고 바로 나왔다. 유명하다던 시청사와 국립박물관이 있는 광장을 찾아 나섰다. 자그마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는 거리를 걸었다. 처음이었지만 낯설지 않은 냄새가 났다. 수제 초콜릿 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몇 개를 사자마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살살 녹는 달콤함. 어릴 적 신부님께서 손바닥에 꼭 하나를 놓아주셨던 그때 그 초콜릿 맛이 났다. 언젠가 내가 크면 신부님의 고향 벨기에에 같이 가자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신부님 저 벨기에에 왔어요. 저 보이시죠? 그동안 신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은혜 잊지 않고 잘 살게요! 고맙습니다. 나의 파파(papa)!'


벨기에 브뤼셀 어느 초콜렛 가게에 들러 photo by luc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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