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넘어 산, 주니어 기획자의 고군분투
회사마다, 직군마다 채용 조건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IT 직군, 특히 기획자의 채용 조건에서 ‘유관 부서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은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있는 것 같다.
취준을 처음 시작 할 때에는, ‘아니 둘 다 한국말로 말하는데 대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거지?’ 라고 아주, 아주 쉽게 생각했다.
첫 회사에 입사해서 외부 개발자와 통화를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1도 알아듣지 못 하겠어서 그냥 “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답하고 내가 두 귀로 들은 대화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놨었다.
그 때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 그 어떤 업무보다 커뮤니케이션이 제일 어렵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여러 책, 아티클, 영상자료 등등이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일 뿐. 커뮤니케이션은 실전이고 할 수록 어렵다.
처해진 환경, 상황 그리고 상대의 성향이나 특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전에 이렇게 했으니 이번에도 이러면 될거야.’ 라고 판단하면 크나큰 오산임을 크게 느꼈다.
“A 해주세요.” 라고 말했을때, A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뒷받침 자료, 예상 질문에 대한 답, A가 안 먹혔을 경우에 대한 대안까지 싹 준비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A도 겨우 해내는 사람이 있다.
전에 함께 일한 동료가 ‘전자’였다고 해서, 이번에 일 하는 동료도 ‘전자’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이걸 통해, 나라는 사람은 고정되어 있으나 상대는 항상 달라지니, 내가 Full Set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A를 요청할 때 필요한 히스토리
동료가 A를 작업할 때 참고해야 할 자료
결과물을 보고, 또는 작업 의도에 대해 클라이언트가 가지게 될 예상 질문 - 과 답변 준비
직무가 직무인 만큼, 기획자는 프로젝트 진행 시 클라이언트와 TF팀 중간에 버티고 서서 각 파트의 요구사항과 작업물들을 전달한다. 여기서 ‘전달’은 사전적 의미대로 ‘전달’ 보다는 프로젝트 수행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을 해야한다.
어느 날, 평소처럼 고객의 요구사항은 쏟아지고, 나는 요구사항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바로바로 디자이너와 퍼블리셔에게 전달을 했다. 그런데 요구사항중엔 ASAP 건과 조금은 기한이 남아있는 것들이 섞여있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인데, 미리 알아두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한 번에 던졌다.
어느 날, 디자이너 한 분이 찾아와서는 “OO님, 작업 리스트 전달 주는건 좋은데 분리 좀 해서 주세요. 나도 여러가지가 섞이니 헷갈려서 그래요”
그래서 이번엔 요구사항을 쭈욱 리스트업 하고 당장 반영해야하는 건, 당장 해야하지만 자료가 아직 오지 않은 건, 추후에 해도 좋을 건 등등 나름대로 작업자가 일정 관리를 하기 편한 방식으로 전달 했다. '월요일 이거, 화요일 저거, 수요일 그거 … 아, 그땐 뭐뭐가 있으니까 목요일에 요청드리는게 좋겠다.'
다시 그 다자이너가 찾아왔다. “OO님, 한 번에 줘여. 나눠서 주니까 한 번에 끝낼 수 있는걸 못하잖아요.”
혼란스러웠다. 한 번에 던지니 나눠 달라하고 나눠주니 한 번에 달라고 하고.
이 경험으로, '작업자에게 마음의 짐을 미리 던진다.' 는 죄책감은 잠시 넣어 두고, 내가 가진 카드를 다 꺼내 보인 다음, 협의점을 찍고 다음 스텝을 밟아가는게 가장 적절한 처세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대외적으로는 ‘너도 나도 만족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성공’이 목표이지만, 암묵적으로 클라이언트와 내부 TF로 편이 갈라져서 ‘우리 팀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한 프로젝트의 성공’ 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칫하다간 기획자가 내부의 적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는 공공의 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프로젝트는 항상 일정과 인력이 부족한데 요구사항은 넘쳐난다. 이것을 기한안에 수행해내야하는 TF팀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클라이언트도 아마 말도 안 되는 일정임을 감안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라고? 그럼 문제가 있고) 결국 고객 설득과 커뮤니케이션은 기획자가 하는데, TF팀 내에서도 납득이 안되면 그건 망한거라고 본다. 나조차도 설득 안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판다? 정말 희대의 언변을 가지지 않은 이상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느 프로젝트의 메인 시안 컨펌단에서, 합의하에 디자이너가 컨펌 리뷰를 진행하기로했다. 사실 난 그 시안으로 내가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실 작업자는 더 할 말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발언권을 넘겼다. 근데 리뷰 2분 전, "근데 OO님, 나 할 말 없는데 무슨 얘기 해요?"
이사람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
그 리뷰는 결국 컨펌 받지 못 하였고, 일정은 딜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일로, 공공의 적이 되든, 내부의 적이 되든 일단 프로젝트 수행을 0순위로 두고 커뮤니케이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무능력한 적' 이 되어버린다. 어느 한 쪽이라도 확실히 해야, 그것에 대한 디펜스를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몰인정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언정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기획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면설계서를 그린다거나, 그런 skill 적인 것은 연차와 노하우가 쌓일 수록 노련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커뮤니케이션은 경력이 쌓인들 별개의 문제같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다치지 않는 법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