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정늘

아빠의 고향은 정확히 말하면 남해안의 한 섬이다.

그래서 명절 때는 우리를 데리고 한 번씩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고는 했다.

섬에 들어가려면 여객선을 타고 여러 개의 섬을 거쳐서 고향 섬 인근에서 작은 쪽배로 한 번을 더 갈아타야 했다. 어른들의 품에 안겨 위태위태한 작은 쪽배로 갈아타서 옹기종기 앉으면 손을 배 아래로 뻗어 짠 냄새가 가득 풍기는 바닷물을 손끝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작은 나무 쪽배였다.


섬의 하나뿐인 작은 항구에 다다르면 다시 위태위태하게 깔린 나무판자 다리를 지나 그제사 섬에 당도한다.

섬에는 큰집 식구들이 살았는데 그 집도 우리 집 못지않게 자식이 많았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알기로 7남매를 낳았는데 그중 한 분은 어릴 적에 돌아가시고 한분은 뱃일을 하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현재는 다섯 형제분만이 남았다.

그 다섯 형제 중 두 명은 도시로 떠났고 큰 아버지는 섬에서 본가를 지켰으며 나머지 두 명은 섬을 떠나 살다가 주변의 소도시에 정착했다.

그중 한 집이 우리 집이다.


섬에 들어가면 친척들이 많아 항상 복작복작했다.

삼촌들과 갓 결혼한 새색시인 숙모들, 어린 사촌들 그리고 같은 섬의 이웃이자 먼 친척들로 항상 붐볐다.


그 시절에 으레 그러하듯 명절에 큰 집에서는 차례를 지냈기에 전 부치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녔고 왁자지껄한 어른들의 술자리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한 삼촌은 부산에 살았는데 얼큰하게 취해 어린 조카들을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장기자랑을 시키고는 했다.

외향적인 몇몇의 사촌들은 춤과 노래를 부르며 갖은 재롱을 피웠고 그럴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로 삼촌은 지갑을 열어 용돈을 뿌리곤 했다.

소심하고 주눅 들어 살던 내향적인 우리 네 자매는 명절 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용돈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 과자 한 봉지 값이나 겨우 받는 게 전부였던 지라 명절에 삼촌들이나 작은 아버지에게 받는 용돈은 어린 우리에게 큰 쌈짓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기자랑을 하기 싫은 마음과 그럼에도 용돈을 얻어내야만 하는 마음이 어린 마음에 혼란스럽게 충돌했다.

삼촌은 장기자랑을 할 때까지 용돈을 결코 주지 않았기에 명절이 다가오면 설레는 마음과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장기자랑으로 몇 주 전부터 고민을 하고 선곡을 하고 노래연습을 했었다.

기억나는 장기자랑의 곡 중 하나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라는 곡이다. 그 어린 게 얼마나 연습했던지 아직까지도 그 노랫말이 잊혀지지가 않고 생생하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아~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린아이가 부르기에 노랫말이 참 쓸쓸하고 애달프지 않은가?

예닐곱 살 그때의 나는 이른 사춘기가 왔었나 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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