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j와 대화 중이었다. 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하는 말들을 고깝게 들으면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 머릿속에 있던 그 말이 내 귀에, 심지어는 내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리는 미친 상황이 전개되었다.
며칠 전부터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j는그 일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쏟아냄과 동시에예전 직장에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젊었을 때 다녔던 회사에서는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면서 느긋하게 일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고개를 45도로 치켜세우며 잘난 척을 시작했다.그녀는 평소에도 아주 정성스럽게 본인에 대한 자랑을 하곤 했었다.
"헐, 젊었을 때는 그딴 식으로 일한 거야? 눼눼..좋은 회사였네요."
비아냥거리는 말투의 말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분명 작은따옴표('...')가 있는마음의 소리였었다. 젊었을 때는 잘 나갔었다며, 자기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서,지금 하고 있는 일을 폄하하는 그녀의 말투가 무척 거슬렸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쩌자고 내 생각이 이리 당당하게 입 밖으로 나왔을까.
사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내가 한 말에 상대방이 상처받거나 화가 났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사람이다. 모임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늘 피곤하다. 혹시 대화중 말실수를 했을까 봐 뇌회로를 꼼꼼히 다시 돌려보기 때문이다.내가 한 말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라도 하면잠을 설치게 된다. 며칠 동안 그 말들이 내 생활에 얹혀 있다. 진 빠지게 곱씹은 후상대방에게 미안했다는 문자를 보낸다. 정작 상대방은 신경도 안 쓰고 있을뿐더러 어떤 이는 나와의 대화내용조차 기억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정도로 하찮은 말들이었다.
그랬던 내가 j에게 마음의 소리를 툭 내뱉었다.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척 난감했다.그냥 쓸데없이 한말이라며 손을 휘두르고, 어색한 웃음과초라한변명까지 해가며 어수선하게 그 순간을 넘겼다.
"아후, 꼴 보기 싫어."
어릴 적부터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말들도 곧잘 삼키곤 했었는데, 갱년기가 찾아오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내 속에만 있던 말들이 부글부글거리고, 달싹달싹하면서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억눌려 있던 마음의 말들이 갱년기를 핑계 삼아 잘못된 방법으로 j에게 터져 나온 거였을까?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뒷전이었고, 늘 상대방기분만 살피기에 바빴던 과거의 나에 대한 복수를 현재의 내갱년기가 시원하게 하고 있는 듯했다. 뭘 그렇게까지 눈치 보면서 할 말도 못 하고 살았냐면서...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살아보고자 한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아니면 아니라고, 화나면 화난다고표현을 해야겠다. 내 마음과 생각을 무시하지 말고 잘~~~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남편과 시답잖은 수다를 떨면서 수박을 먹고 있었다. 그는 썰어 놓은 수박 중에 맛있는 부분만 골라서 먹었다. 마음의 소리가 툭 튀어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