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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낯선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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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은 Nov 15. 2015

여행의 끝에서 여행이 시작되다.

2009년 10월 프놈펜  #01

여느 여행이 그렇듯, 돌아오는 것이 여행의 끝이라면

나는 그 여행을 아직 끝내지 못했다.



2009년 10월 15일,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왔다. 한 달 일정의 이 여행은 나름 인연이 깊은 L사진가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었고 별다른 계획도 없이 그저 티켓을 사고 가방을 꾸렸다. 지인들과 함께 계획했던 여행이었는데 막상 떠날 날짜가 다가오자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공정무역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알게 된 L사진가는 한때 신문기자였다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이라크나 티벳, 네팔 등 힘들게 사는 사람들 곁에서 사진을 찍었다. 네팔 사진을 기부해주는 일로 알게 된 그는, 어느 날 캄보디아로 떠나기로 결정을 하고 자신이 있는 동안 놀러 오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 후 일 년 반후,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애초의 계획보다 이른 입국 계획이었다. 그를 함께 알고 지낸 몇몇 지인들이 그가 입국하기 전에 같이 놀러 가자는 얘기가 나왔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 낯선 땅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결국 혼자 가게 되었다. 혼자 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L사진가가 프놈펜 공항에 마중 나올 것이지만 여행은 결국 혼자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잡아준 유일한 일정은 <반티에이 쁘리업>에서 일주일 정도 보내는 것이었다. <반티에이 쁘리업>은 장애인 직업 기술학교이다.

L사진가가 잠시 한국에 왔을 때 마침 그곳 디렉터이신 D신부님도 한국에 들어와 계셨다. 신부님은 올해 졸업생을 위한 봉제 프로덕션을 새로 만들었다며 디자이너인 나에게 그저 한번 와서 보고 필요한 것들을 체크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내 여행 일정은 한 달이었고 <반티에이 쁘리업>에는 열흘 정도 있다가 다른 곳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길 위에 여행이란 언제든 길을 잃기 마련 아닌가. 헤매고 헤매다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고.

나중에 들인 이야기지만 L사진가는 아는 디자이너가 캄보디아에 놀러 온다며 새로 시작하는 봉제 프로덕션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를 D신부님께 소개했지만 사실 신부님은 이 여자가 진짜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하셨단다. 그저 인사치레로 오시라.. 와서 봅시다 인사하셨다고.



밤 11시쯤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리자 어둠만큼이나 무거운 습도와 더위가 나를 안았다.

여행의 설렘과 두려움, 그것은 어느 여행에서나 느껴지는 감정이 아닌가. 사실 떠나기 전까지도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사진가에게도 부담일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여행을 가는 것이 정말 잘한 일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미 D신부님을 소개받은 터라 내빼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낯선 더위 만큼이나 낯선 사람들 사이로 L사진가가 보인다. 반갑다기보다는 도착에 대한 안도가 먼저다. 도착의 안도는 떠나왔다는 것에 대한 확인 같은 것이다. 이제 무 룰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에 나왔다.

불빛도 별로 없는 낯선 거리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밤길은 그저 어둡고 낯설었다.

그 집 바로 앞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납골당으로 쓰는 탑들이 즐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기는 시간이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3층까지 걸어 올라 갔다.(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캄보디아의 대부분의 계단은 참 인체공학을 거스르는 각도이다.) 그는 나름 전망 좋은 베란다에 저녁 술상을 준비해 두었다. 좁은 3층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화로에 새우와 고기을 구워 소주와 마셨다. 자정을 넘긴 시간, 나는 캄보디아 프놈펜에 들어온지 나름 무박 이틀째를 지나고 있었다. 그 밤에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정성을 보여주신 L사진가와 나는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셨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집앞 죽은 이들의 탑들 위로 지는 노을이 아름답다는 이야기와 그 절 담밖으로 게이바(bar)가 있다는 이야기가 남았다.


다음날 아침 해장으로 돼지 내장이 듬뿍 들어간 쌀국수를 먹었다. L사진가는 연신 자신이 좋아하는 집이라며 “맛있지?”를 연발했지만 낯선 곳에서의 늦은 아침이 속편 할리 없었다. 먹는 둥 마는 둥 기름진 국물에서 국수 면발을 건성으로 건져먹었다.

그는 다시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웠다.


어제의 공항을 지나 한참을 도시 외곽 길로 달렸다. 10월의 프놈펜은 우기였고 그날은 하루 종일 흐린, 캄보디아에서 며칠 안 되는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 한 시간이 좀 안되게 달려 우리는 <반티에이 쁘리업 Banteay Prieb> 정문에 도착했다. 그는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들어가기 전에 담배를 한대 피웠다. 장애인 기술학교 <반티에이쁘리업>의 첫인상은 포로 수용소 같았다. 철조망으로 담장을 두른 학교는 폴폿시절, 군인들이 쓰던 군대건물 그대로 였다. 펄럭이는 캄보디아 국기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캄보디아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왠지 어둡고 습한 기운이 있는, 그저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

킬링필드와 앙코르왓,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나는 결국, <반티에이 쁘리업 Banteay Prieb>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연재됩니다.




<반티에이 쁘리업 Banteay Prieb><JSC-jesuit service cambodia/NGO>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기술  학교입니다.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 앙스 누울 지역에 위치한 24년 역사의 <반티에이 쁘리업>은 전쟁으로 장애를 입은 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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