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에서 4월, 다시 한국 #02
한 달 기한의 여행이 3달째 접어들면서 그제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을 예약했다.
2010년 1월 4일, 한국은 한겨울이었다. 공항에 내리자 몸이 말라붙기 시작했다. 눈이 많이 와 있었다.
한국의 겨울은 건조했다. 예전보다 더 건조하고 예전보다 더 추웠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 떠나기 전에 디자인 시안을 넘겼던 일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한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공사현장이 있던 강남 골목은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사람 수보다 많은 조명들이 밤새 반짝였지만 그들의 얼굴은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부럽지도 아쉽지도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불안과 불만의 연속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었다. 사람들은 오직 한길만 보고 달렸다. 나는 그들을 쫓아 갈 능력도 열정도 없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방황하는 청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 부류로 분리수거되었다. 취직이라는 이름의 조직생활은 사람을 모두 똑같은 기준으로 재단했고 남들과 다름이 인정되지 않았다.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도 별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튄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았다.
다시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의 샹그릴라에 갔다 온 콘웨이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돌아가기 위해 모든 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아직 꿈에서 덜 깬 사람처럼 다시 돌아 갈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혼자 웃다가 울다가 했다. 캄보디아에 있을 때 신부님 중 누군가 캄보디아 귀신 이야기를 했었다. 캄보디아에 왔던 사람들 중 몇몇은 캄보디아 귀신이 씌어서 캄보디아에 머물거나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고. 그저 웃으며 들었던 농담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내 상태를 봐서는 딱 캄보디아 귀신이 씐 경우였다.
요즘도 D신부님은 새로운 활동가가 오면 귀신 이야기를 하신다. 그리고 그 산 증인으로 나를 지목하신다.
친구들은 새까매진 나를 보고 캄보디아 사람 다 되어 돌아왔다며 놀렸다. 캄보디아 여행이 한 달에서 두 달로, 두 달에서 세 달로 연장되는 동안 친구들은 나에 관한 여러 추측들을 했다고 한다. 캄보디아 남자랑 눈이 맞아 결혼을 했을 거라는 둥, 다시 안 올 것 같았다는 둥…, 나는 영어도 잘 못하고 혼자 해외여행을 해본 적도 없다.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있지만 나의 까칠한 성격과 낯가림, 남에게 잘 부탁 못하는 성격을 알기에 외국에서 혼자 산다는 건 그냥 한번 정도 꿈꿔 본 일이다.
내가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왠지 그럴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말은 나에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사람들은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나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조직사회에 적응 못하고 돈 되는 일보다 돈 안 되는 일을 쫓아 다니는 사회 부적응자였을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나는 떠날 용기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그곳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나름 내 인생의 큰 결심이었는데 주변의 반응이 이렇게 단순하게 나오니 뭔가 김 빠진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반대하셨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적극 찬성하는 쪽도 아니셨지만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편이셨다. 하지만 이번엔 꽤 단호히 반대하셨다.
20대 후반에 고교 때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저 국내여행 일주일쯤 하다가 오겠다고 거짓말을하고 집을 나선적이 있다. 물론 나의 여행은 한 달 일정이었고 내가 떠나고 나면 언니가 사실을 말하는 걸로 계획이 짜여 있었다. 엄마는 내가 해외여행을 간걸 알고 나서 울었다고 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 엄마가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가장 큰 걱정은 부모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었다. 8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당연히 날 이해해줄 수 없었겠지만 나는 이미 돌아가기로 마음먹었고 이별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저 비행기를 타면 이별이 따라 왔다. 단순했다는 건 쉬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싶었고 그 계획안에 그를 포함시킬 수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삶의 터전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쉽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단순했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참 가진 것이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가지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시시해졌다.
지난 3개월의 경험이 내 삶을 흔들고 있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잠을 잘 때조차 그곳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유난스럽게 빠져있었다. 그 대상도 모르고 엄청난 짝사랑에 시름시름 앎 던 시간이었다. 약간은 멍하기도 하고 틈만 나면 그곳 생각이 났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4개월 만에 나는 다시 비행기를 탔다.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려 짐을 싸는 일은 두려움을 넘어 막막한 설렘이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 온후 4 개월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주변들도 정리를 시작했다.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 년이든 이년이든 기한도 정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가는 데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잘 쓰진 않았지만 왠지 필요할 것만 같던 신용카드 두어 개와 10년 넘게 쓰던 핸드폰 번호, 아직 부을 날이 많이 남은 연금보험까지 없애거나 정지, 한국에 어떤 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성격 탓인지 나는 할부로 물건을 사는 것을 무지 싫어한다. 그래서 웬만한 물건은 할부로 사지 않는다. 보험료나 핸드폰 비 등 다달이 낼 수밖에 없는 비용들도 최소로 해 놓고 살았다. 핸드폰을 없앨 때는 마치 주민등록을 말소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왠지 모를 통쾌함이 있었다. 핸드폰 센터 직원은 오래된 회원이라 혜택도 많은데 없애지 말고 장기 정지해 놓으라고 충고했지만 미련이 없었다. 그나마 있던 할부가 끝나고 나니 감옥에서 출소한 모범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더 늦기 전에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샀다.
새로운 봄날, 2010년 4월 30일
인천 공항에는 한국에 돌아온 L사진가와 지인 몇몇이 나왔다. 나는 그가 캄보디아로 떠날 때 공항에 마중을 나왔었다. 이제 그가 캄보디아로 떠나는 나를 마중하러 왔다.
상황이 좀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 둘 다 의도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