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다른 건 몰라도 제 인생에 등산이란 단어는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스물한 살에 굳게 다짐한 후 십 년 동안 지켜온 약속이니깐요. 2007년 여름, 호기롭게 친구들과 걸었던 관악산 이후로 산은 밑에서 올려다보는 곳이었습니다. 케이블카나 자동차가 아니면 절대 오르지 않겠다 다짐했더랬죠. 평범했던 사내가 이토록 비뚤어졌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 당시 경험담을 설명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여름방학. 학기도 끝났겠다, 할 일없이 심심해하던 차였습니다. 친구 꾐에 선선히 낚였더랬습니다. 경상도 촌놈이 무얼 알았겠어요? 서울 안에 있는 산은 다 남산 같은 줄 알았거든요. 남산마저도 케이블카에 의지하여 내려오기만 했었으니 어렵다는 감도 없었죠. 복장부터 불량했어요. 동네 뒷산 오를 차림에 대충 꺾어 신은 운동화. 물 한 병 챙겨가지 않았던 호기로운,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서울대 안쪽으로 뻗었던 입구에서부터 고통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물을 챙기긴 했었네요. 누군가가 얼려갖고 온 2L짜리 페트병 생수 하나가 일행의 유일한 생명줄이었습니다.
산 이름 중에 ‘악’ 자가 들어가면 악 소리 나게 험난 하단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중턱 즈음부터 이어지는 바윗길에 무언가 잘못되었단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죠. 아니 뭐 이렇게 가파른 데다 온통 바위라 힘든 곳이 서울 한복판에 있나 싶었습니다.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친구들끼리 자존심에 서로 먼저 그만두잔 이야기도 못했거든요. 결국 네 발로 정상까지 기어갔습니다. 처음엔 생수병 가져온 친구한테 번거롭게 짐 되는 거 가져왔다며, 무겁게 뭘 이걸 꽝꽝 얼려왔냐며 핀잔했는데. 네가 들고 온 거니 우리한테 주지 말고 혼자 들라고 타박했었는데. 나중엔 서로 들고 가려고 싸웠더랬죠
정상에서 보았던 풍경 같은 건 단 하나도 생각나질 않습니다. 단지 죽을 정도로 힘들고 지쳤던 기억. 정상에 있던 절간에서 얻어마시던 물 맛 정도만 기억납니다. 생명수와 다름없었죠. 시원하고 달았습니다. 짜게 젖은 옷은 훨훨 벗어젖히고 물바가지 안에 첨벙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짐했습니다.
내 절대로 등산과는 결단코 절연하리라.
그런데 말입니다. 올해부터 스스로 산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자의에 의해 날만 좋다면 일주일에 한 번은 산으로 갑니다. 그뿐만이겠어요? 야금야금 등산 장비를 사모읍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 가득한 도심에서 한적한 산 중턱으로 내몰린 모양새긴 한데. 그래도 막상 해보니 또 괜찮더란 말이죠.
코로나 시대의 등산은 친구입니다. 마스크 벗고 싶고, 상쾌한 공기가 간절해지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입니다. 괜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헬스장 대신으로도 그럴싸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년부터 시작했던 운동 덕택에 체력은 십 년 전보다 되려 좋아졌나 봐요. 조심스레 청계산이란 곳부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짝 마스크를 제쳐보았는데. 삼월의 찬 공기가 온몸으로 스미는 짜릿한 감각이 너무나 상쾌하여 살짝 울 뻔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린 친구입니다.
그래도 몇 개월 산행으로 체득한 꿀팁이 두 가지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라도 등산을 시작하실 분들께 도움이 되고자 아낌없이 공유드립니다. 첫째. 표지판에 적힌 남은 거리를 믿지 말라. 그래도 대충 1km면 어느 정도 걸리는지 감이 오질 않겠어요? 근데 산에서 만큼은 사용하는 치수가 다른가 봅니다. 분명 그만치 올랐는데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절대 도착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저만의 방식을 전수드립니다. 표지판의 숫자를 믿지 마세요. 숫자 근처에 긁힌 흔적들을 믿으세요. 나보다 먼저 그곳에 올랐을 사람들의 경험담이 빅데이터 마냥 축적되어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숫자가 성할 땐 ‘아, 이 앞은 걸을 만 한가보다’, 숫자보다 숫자가 있었던 흔적이라고 보는 게 나을 만큼 상처투성이 일 땐 ‘아, 망했구나’ 싶어 하며 숨을 고르시면 됩니다. 숫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흉터 투성이라면 다른 길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걸 추천합니다.
둘째. 지명을 믿어라. 산은 그냥 이름 하나가 통째로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봉우리마다 고개마다 무수한 이름을 갖고 있더라고요. 근데 이게 또 은근히 직관적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부터 지나쳐야 할 지점에 ‘깔딱 고개’란 지명이 있다면 망한 겁니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만해서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작명가 혼자서만 숨이 모자라겠어요? 너 나할 것 없이 거기서 거인 거죠. 그 앞으론 말도 안 되는 급경사가 펼쳐질 겁니다. 그러니 표지판에 주목하세요. 지명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 그나마 나으니깐요.
여기에 굳이 세 번째 팁을 추가하자면. 요즘 같은 때 사람을 피하고 싶다면, ‘가능하면 평일 산행, 혹은 약간 근교로 나가는 쪽이 좋겠다’고 덧붙이겠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다 똑같습니다. 날이 좋아질수록 등산객들로 붐빕니다. 이른바 ‘인싸’들의 SNS 인증 명소로 산이 되었다던데 진짜 그런가 보더군요. 5월 즈음부턴 청계산은 다시 못 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상 표지석에 인증샷 찍으려고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니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되었거든요.
사람들을 피해 생긴 취미인데 굳이 인파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점점 멀리 향했습니다. 기왕 지사 안 가본 산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고요. 기분 탓인지 집에서 멀수록 산도 이쁘고 좋더군요. 엄청 많은 곳을 다녀보진 못했다만 유명산이라던가 계룡산은 오르는 맛도 있고, 정상에 펼쳐진 모습도 너무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관악산 생각이 났습니다. 십 년만의 복수전이랄까. 무언가 풀고 가야 할 앙금 같은 거죠. 여전히 호락호락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친해지고 싶어 졌습니다. 6월 초 더운 날씨라서. 평일 아침을 택했습니다. 확실히 다르긴 하더군요. 십 년 전과는 다른 길을 택하긴 했다만, 초입부터 정상까지 내내 바윗길이었습니다. 고행에 가까운 길. 그래도 물도 초코바도 챙겨 오르는 오늘은 그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주위를 살피며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말입니다.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와 적막한 자연의 호흡. 다시 만난 네가 성격이 유해진 건지 내가 십 년 동안 달라진 건지. 좋았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다시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녔을 겁니다. 너에게 된통 당한 후로 먹었던 마음가짐이 여간 단호했던 게 아녔거든요. 올해 참 잃어버린 일상이 많은데. 당신만큼은 좋았던 기억에 속하여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별일 없음 계속 이어지도록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이왕이면 맘 편히 함께했으면 좋겠네요. 많은 인파 속에서도 당당히 마스크 없이 만끽하고 여기저기 숨겨진 명산도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그런 일상을 말입니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그 언제가 찾아오길 빌어봅니다. 일단 이쪽은 언제든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러 다닐 테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