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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Mar 11. 2016

홍콩 표현기 _#3.

홍콩의 밤 (1) _ 길을 잃다. 

  홍콩 섬에 위치한 숙소에 빠르게 짐을 풀고 길을 나섰다. 내륙 쪽에 위치한 침사추이에 가기 위해. 애초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첫날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고 남는 시간에 다른 곳들도 들리기로 계획했었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간단히 말해 바다를 화폭으로 삼고 빌딩을 물감처럼 채워 넣는 야경 쇼인데 빌딩의 화려한 불빛과 바다를 수놓는 반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단다. 사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워낙 유명한지라 내키지는 않아도 무조건 계획에 넣기로 했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끌리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먹고 싶지 않은 날도 있으니까. 


  침사추이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야경 쇼 전까지 여유가 있어 허유산에 들르기로 했다. 허유산은 망고 베이스의 버블티 가게인데 홍콩의 대표 디저트 체인점이란다. 디저트에 환장하고 망고는 없어서 못 먹으니 먹을 수밖에 없는 메뉴. 심지어 홍콩 역에서 식사 후, 그렇게 유명하다는 스타벅스 수박주스에 실망한 상태라 입가심이 필요했다. 체인점이라 들릴 수 있는 곳이 많았는데 침사추이 역 근처에 있는 곳이 가기 가장 편하다 싶었다. 이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딜가나 지옥철은 매한가지. 사실 홍콩이 더 심했다.

  침사추이 역에서 올라왔다. 그렇게나 바라던 홍콩의 풍경이 눈앞의 별처럼 하나하나 박혀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거리를 밝히는 원색 조명들. 거리 양쪽으로 늘어 선 각양각색의 빌딩들. 에어컨 실외기들이 수놓은 빌딩의 등판과 그 사이를 빼곡하게 채운 간판들. 어떻게 보면 매우 낡은 도시의 단면도. 그럼에도 소개팅 첫 대면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소년의 마음은 머릿속에서만 그렇게나 그려오던 이상형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화들과 사진들로만 봐오던 도시의 모습이라서. 그 냄새라서. 길 찾기에 앞서 사진기 셔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침사추이에서 나와 첫 도시의 풍경.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지도는 무시한 지 오래. 

처음 가려던 허유산은 온 데 간데없었다. 


  사실 나는 지독한 길치다. 자주 가는 길도 종종 헤맨다. 처음 가는 곳은 헤매지 않고 가는 경우가 드물다. 부평역 지하상가나 서울 코엑스는 고문이 따로 없을 정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돌아다니고, 여행은 혼자 무슨 수로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로. 이 때문에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늘 일정을 여유롭게 짜되, 들리기로 결정한 곳에 대해서는 동선을 세세하게 짜는 편이다. 길을 헤맬 것으로 상정하고, 또 최대한 헤매지 않기 위한 나름의 전략. 마음가짐도 조금 다르다. 어차피 헤맬 길이라면 좀 더 돌아가는 길을 즐기기로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헤매는 길에서 의도치 못한 풍경에 더욱 반하는 경우도 많고. 

복잡히 날 유혹하던 간판들.

 계획을 세울 때 찾아본 허유산은 어딜 가든 있겠다 싶어 자세히 찾지 않은 점이 첫 번째 실수. 길가의 풍경에 반해 엄마손 같은 구글 지도를 꼭 부여잡기를 잊은 어린 마음의 손아귀가 두 번째 실수. 덕분에 완벽히 계획 밖의 길로 들어섰다. 설상가상 허유산은 나타날 기미도 없고. 애초에 그나마 정신을 차린 곳에서 차선책으로 가까운 곳을 찾아갔음에도 그 자리에 없었다. 짧은 영어로 길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뿐. 허유산 간판을 찾느라 이리저리 쳐다보는 통에 홍콩 길거리는 실컷 구경했다만 뭔가 억울했다. ‘내가 좋아하는 망고니 꼭 먹어야 해.’에서 ‘그깟 망고 하나 먹겠다고 한 시간을 헤맸나.’로 마음이 바뀔 만큼. 그보다 허유산 한 잔 때문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구글 지도를 확인해보니 심포니 오브 라이트 반대쪽으로 와버렸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급히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 마지막까지 한 번은 가겠지 싶은 마음에.


그런데 인생은 참 재밌다.
참 웃기게도.
포기하자마자 눈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억울해서라도 그 자리에서는 사 먹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한 달음에 달려가 망고 맛을 주문했다. 그 탓에 사진 한 장 남기질 못했지만 역시 먹었어야 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스타벅스 수박 주스를 잊기에 안성맞춤. 그새 행복해졌다. 참으로 손바닥 뒤집듯 검소한 자존심이었지만 변수 많은 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은 성격이라 스스로 치켜세웠다. 빨대를 입에서 놓지 않은 채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잘 보이는 부둣가로 향했다. 참 이래저래 맘에 드는 도시였다. 홍콩은. 

정신이 팔렸다 허유산에서 나가면서 겨우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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