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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May 16. 2016

한 걸음 떼기

여행을 칠해가는 나의 의미.

 다양한 우연이 중첩된 방향으로 걷는 한 걸음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에 아로새겨진 첫 이끌림과 같은 그 한 발자국은. 결국 그렇게 흐를 운명이었을까, 혹은 그렇게 되어 버린 의지였을까? 물길에는 특별한 방향도 목적도 없다. 그저 큰 흐름에 따라 하나가 끌리고, 또 전체의 물길을 잇는다. 그 안의 원칙은 쉬운 듯 복잡하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기본적 원리에 많이 흐를수록 지반이 깎여 더 큰 물길을 만들며, 때로는 기운이 끊기기도 하는 등의 수많은 복잡성이 덧댄다. 전날 온 비에 지반이 약해진 곳을 뚫어버리기도 하며, 큰 갈림길에 도달해서는 한쪽을 죽여버리기도, 잡아먹기도, 혹은 상생하기도 하면서. 

길은 알 수 없기에 길이다. _ 백양사에서.

 나는 할아버지를 무척 닮았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일은 당연한 일이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일정 부분 담아가는 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예상치를 훌쩍 넘겼다. 외모도 외모거니와 좋아하는 것이나 식성까지 꽤나 당신을 닮았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께서도 생각하시길, 어렸을 때부터 워낙 품에 안고 사셔 옆에서 자연스레 닮았으리라 추측한다.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배고프다는 손주를 위해 당신 평생 처음 집에서 라면 물을 올리셨던 일만 보아도 그랬다. 워낙에 아끼셨고 사랑을 주시며 옆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보니 자연스레 당신의 모습을 닮아갔으리라.


그 아낌의 결정판은 당신과 나 단둘이 떠난 여행들이었다.


 다른 가족들 모두 다 떼어놓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여행하기까지. 많은 우연과 사건이 모여 길을 만들었다. 우선 당신께서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댁 곳곳에 당신께서 돌아다니신 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있을 정도로 여러 곳을 다니셨고. 내 밑으로 터울이 많아 한동안 나 홀로 손주였기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점도 한몫하였다. 심지어 어렸을 때는 걸어서 5분 거리,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살았으니 더더욱. 제 집 드나들 듯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당신께서 어린 손을 붙잡고 여기저기를 다니셨다. 할아버지와 처음 단둘이 여행을 시작하기는 초등학교 5, 6학년쯤이었다. 계기는 당신께서 손자의 독립심을 키우고 싶었다는데서 출발했고 옆에 두고 있던 손자가 남쪽 끝으로 이사를 가버린 탓에 헛헛하여 좀 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하신 점도 더해졌다. 


 첫 시도는 조심스러웠다. 보다 내 쪽에 가까운 곳에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여행을 다녔다. 처음 할아버지와 떠났던 여행지는 밀양. 나에게는 무궁화호를 타고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으나 당신 댁에선 서너 배가 더 되었다. 여행에 횟수를 더해갈수록 서로 여행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비슷해졌고, 결국 그 시간이 엇비슷해질 무렵에는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을 시작으로 근교의 일본까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당신과 함께. 

 부드럽지만 강하게 손을 마주 쥔 당신의 체온이 마냥 좋아 함께 걷는 길도 좋았던 나이는 훌쩍 넘겼다. 이제는 낯선 곳에 방문하고 즐기는 법을 당신께 배워 혼자, 또 같이 길을 떠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좋아 여행을 떠난다. 더 이상은 당신과 함께 같은 곳을 즐기고 느낄 수는 없지만. 배웠고, 남았다. 당신이 남기고 간 여행의 의미는 그 하나하나의 경험마다 다른 목적에 의미를 부여한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타던 기차는 늘 설렜다. _ 서울 용산에서.

 원하는 곳과 그곳의 랜드마크, 꼭 들러야 하는 맛집, 사 와야 하는 특산품 등등. 기본적인 스케치는 떠나기 전 미리 정해져 있다. 거기에 어떤 그림을 더하고 어떤 색을 칠할지는 여행자의 손에서 결정되고, 당일에 결정되며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마치 기본적인 도안이 그려져 있는 컬러링 북을 꺼내 드는 사람의 마음처럼. 같은 스케치라도 칠하는 사람의 마음과 원래의 선호에서부터 시작점이 다르다. 색채나 조합이 비슷하더라도 완벽히 같은 결과물은 없다. 애초에 같은 사람이 똑같은 컬러링 북 몇 권을 그리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같을 수 없는 것처럼. 하다 못해 칠해진 채도가 다를 수도 있고, 첫 작품보다 그다음이 더 그럴 듯할 수 있다. 반대일 수도 있고. 


 지금은 그저 함께 또 혼자. 나름의 인상적인 그림을 채워 넣으려 노력한다. 의식적으로라도 한 번 더 붓칠을 해보려 한다. 당신에게서 색채에 대해 배우기보단 붓칠 하는 법을 배워서이기도 하며, 짧게라도 조금이라도 큰 그림에 쉼표를 새기는 일이 좋아서기도 하다. 아직 여행에 관련된 버킷리스트는 다음 줄을 넘기지 못했음에도, 글은 많이 쓰고 되새겨야 손에 익음을 알기에. 소소한 일기장의 담백한 한구석이든 물려받은 카메라의 필름 한 장이든 조금이라도 더 새기려 한다. 그것이 여행에 대해 당신께 배운 마음이자, 한 걸음을 떼는 나의 마음이다. 지갑 속에 품은 사진과 같이 당신과 나의 시간은 멈추었으나 멈추지 않은 채.

비가 오는 거리라도. 여행은 늘 의미를 품는다. _ 홍콩에서.


 중학생의 앳된 나와 당신은 같은 모양의 빵모자와 비슷한 점퍼를 걸치고서. 오사카 성밑에서 사진을 찍었다. 필름으로 품었다 핸드폰 사진으로 다시 한 번 새겨 손에 들고 다니는 당신과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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