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으로 사는 ‘소심인’씨의 사정.
‘나, 순례자의 길에 가려고.’
‘응? 스페인?’
‘응. 산티아고.’
‘갑자기? 언제 가게?’
‘6월 초에?’
‘얼마나? 그럼 회사는?’
‘관두려고. 대충 한 달쯤? 파리 in, 바르셀로나 out으로 가려고.’
‘아 진짜? 그때 가면 축구 직관은 못하고 오겠다. 아쉽네. 그래도 바르셀로나까지 가면 메시는 보고 와야 될 텐데.’
축구로 어설프게 화제를 돌리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친구의 선언에 적잖이 놀랬다. 본인이 말한 6월 초까지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는데, 즉흥적으로 한 달간의 순례자 길에 나선단다. 물론 그는 나름대로 전혀 즉흥적이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이유를 캐물어보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의미가 없단다. 회사도 재미없고. 무언가 어설픈 반문이나 훈계조로 반대하기보단 매서울 6월 스페인 햇볕을 걱정해주기로 했다. 그의 인생이라서 이기보다는 그에게 공감하니까. 단지 그가 나보다 용기 있는 것뿐이니까. 사실 친구의 말에 회사 이야기부터 꺼내버린, 속물스러운 노예근성에 진절머리가 나 더더욱 토를 달 수 없었다.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말뿐이었던, 허나 당시에는 진심 가득했던 다짐들이 떠올랐다. 락스타의 꿈은커녕 기타나 음악은 취미로도 내려놓은 지 오래다. 한 장밖에 구하지 못했던 2002년 월드컵 티켓을 8년 뒤 남아공 월드컵 때 두 장으로 보답하겠다 호언장담했던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첫 승리를 혼자 보고 온, 중학생 아들의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변치 않겠다 다짐했던 사랑의 언어들도 지금 보니 다 새빨간 거짓말. 당시에는 모두 진심이었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행도 그렇다. 입으로야 늘 떠나고 싶다고, 한 달쯤 외국에 나갔다 오면 여한이 없겠다 되뇌곤 한다. 실제로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고 여행을 자주 떠나는 편이기도 하니까. 다만 딱 회사에서 허락하는 연차 선에서 한정된 이야기이며, 한 달 정도의 장기 계획은 언감생심이다. ‘회사를 관둘 순 없으니까’, ‘한 달 나가 살 돈은 이제 모아봐야지’등의 핑계를 의식 한편에 쌓아두고 살다 필요할 때가 오면 습관적으로 꺼내 든다. 그런데 그는 진짜로 떠난단다. 다 내려놓고 훌쩍 갔다 오겠단다. 현실적인 걱정은 충분히 그의 몫일 테니 입만 산 친구의 역할은 그저 응원에 응원을 더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내가 현재를 열심히 살지 않는다거나 거짓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다. 분명 그랬던 시절도 있기는 했었으나 지금은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고, 내뱉은 말은 최대한 지키려 한다. 단지 친구의 다짐을 통해 말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던 후회의 순간들이 떠올랐고, ‘소시민’으로 사는 지금의 ‘소심인’ 처지가 약간은 서글퍼졌을 뿐이다.
원래보다 더 그럴듯한 의역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8마일’의 대사가 떠올랐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사실 영화 속 에미넴의 처지처럼 최악의 상황도 아닐뿐더러, 개인적으로는 되려 만족도 높은 삶을 살고 있어 배부른 넋두리에 불과하지만. 조금은 감상적으로 변해버리고만 의식의 흐름을 보니 친구와 맞댄 술잔이 얼추 주량에 도달했는가 보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다 날개도 채 펴보지 못하고 박제된 꿈에 눈길이 닿는 순간들이 있다. 어쩔 수 없었던 일들이지만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은 왜일까? 만약 십 년, 이십 년 전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들이 소중하게 적어놓은 꿈들을 외면하고 살아온, 오늘의 나와 마주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그래도… 형, 혹은 미래의 나야. 그동안 수고했어.’란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살면서 손에 꼽힐 정도로 눈물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럼에도, 과거와 오늘의 나 모두가 부둥켜안고 우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건네어 받고 싶다.
친구가 떠나려는 ‘순례자의 길’을 응원한다. 그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며, 지금 느끼는 결핍이 해소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오늘 맡은 ‘소심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