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쟁이만의 애환적 사고.
‘땀쟁이’들은 턱밑까지 쫓아와버린 여름이 두렵다. 여름은 그들에게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운 계절이다. (만약 ‘진짜’ 땀쟁이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사실 여름보다 겨울 쪽이 더 곤란하다는 말을 공감해주리라 믿는다.) 땀은 땀대로 육수 뽑듯이 샘솟는 데다 마르고 난 뒤의 끈적함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찝찝하고 불쾌하다. 거기에 땀 자체보다 더 신경 쓰이는 ‘땀냄새’ 쪽도 있다. 땀은 직접 살을 맞댄 경우가 아니고서야 오롯이 본인만의 불편함이다. 멀찍이 떨어진 타인이 불편할 일을 꼽아봐야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바라볼 때 동반되는 답답함 혹은 안쓰러움 정도일까? 허나 냄새는 다르다. 그들은 쉽고 빠르게 주변을 잠식하며, 퍼지고 나서는 집요하게 주위 사람들의 코 끝을 때린다. 익숙해져 역치에 다다르더라도 여전히 코끝을 살살 간질이는 불쾌함이란. 그리고 그 불쾌함의 근원이 본인일 때의 민망함이란. 상상하기도 싫지만 땀쟁이들에게는 곧잘 현실로 벌어지는 삶의 전투다. 땀쟁이들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매일같이 지는 싸움을 해야만 한다.
자기 살 냄새를 시시각각 맡을 수만 있다면 적당히 대처할 수라도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본인의 살 냄새를 스스로 맡기란 매우 힘들다. 가끔씩 맡아질 때도 있긴 하지만, 자기 땀냄새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까지 왔다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버린 상태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밀폐된 공간 속 화생방 훈련이나 가을 한창때의 은행나무 아래와 견주어볼 만할 테니. 보통 후각 기관은 본인 체취나 땀냄새에 너무 적응되어 있어 맡을 수 없는 쪽에 가깝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색무취 같지만 남들은 곧잘 맡는 고유한 흔적이 된다.
사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더라도 몸에서 나는 땀냄새나 체취가 궁금하고, 또 맡아보고 싶다. 평소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고 나면 좀 더 자주 씻는다거나 향수를 써서 기본적인 체취를 보완할 수도 있을 테니. 본인에 대한 자각과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발로로써. 허나 맡을 도리가 없으니 유지하면 되는지, 혹은 개선점이 필요할지 등등,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냄새 자체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향기의 호불호가 확실하며, 명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살 냄새 부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것도 알고 싶은데, 애초에 맡을 수가 없으니 호인지 불호인지조차 알 수 없다. 고약스러울 때만 겨우 맡을 수 있으나 그 경우는 빼고 말하는 쪽으로 하고 싶다. 나의 체취 역시 내가 좋아하는 류이길 바라지만. 늘 불안하다. 좋지 않은 냄새일까 봐, 혹은 이미 풍기고 있을까 봐.
생각해보면 ‘글’도 땀냄새라던가 체취와 비슷하다. 다른 사람의 글은 읽다 보면 그 사람만의 스타일이나 버릇 같은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던가 이런 흐름은 나중에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선망 같은 감정도 부수적으로 생기고. 하지만 내 글에서는 도통 느낄 수가 없다. 무색무취다. 쓰고 나서 내용을 까먹을 정도로 오래 묵혔다 꺼내보았을 때의, 그 조잡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경우와는 다르다. 내 글만은 어떤 스타일인지, 스타일이란 것이 있긴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잘 쓰고 있는 건지 이렇게 써가면 되는 건지, 어떻게 해야 더 맛이 날지 등등. 스스로의 고찰만으로는 맡아지는 흔적이 너무나 희미하다.
혹시라도 무색무취한 글을 쓰고 있어 맡을 수 없었던 것이라면.
조금은 울고 싶어 질 것 같다.
글을 지금보다 잘 쓰고 싶다. 훨씬 많이. 언제나 진심으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문장은 괜찮은지 읽는 호흡이나 쉼표, 마침표는 다른 사람의 호흡에서도 자연스럽게 읽히는지.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고, 마음에 닿는 구석이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살 냄새처럼, 4월의 봄바람처럼 따스하거나 10월 초 즈음의 저녁노을처럼 청량감 있는 쪽이었으면 좋겠다. '땀쟁이'만의 애환을, 쓰고 있는 글에서까지 겪고 싶진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