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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Jun 05. 2019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역시 인생은 타이밍.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위의 익숙한 문장은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오역하여 광고에 쓰인 바람에 알려졌다. 덕분에 세상에 나왔던 적 없는 말은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양 둔갑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허나 이번 경우만큼은 우물쭈물하다 진짜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매우 모순적인 성격상, 뻔히 보이는 결과에도 게으르다는 핑계를 대며 행동하지 않아서. 평소에는 그렇게 나풀 나풀대는 엉덩이를 가졌으면서도 이런 일에만 묵직해져 버려서.  


   평소 아끼는 셔츠가 한 장 있다. 길이도 두께도 입었을 때의 모양새로 맘에 들며 주머니 쪽의 포인트까지 귀여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검정 셔츠. 예전에는 정말 자주 입었는데, 작년 말 아껴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그저 옷장에 모셔놓고 사는 중이었다. 비싼 셔츠는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어차는 정도가 꼭 가격과 비례하지만은 않으니까. 아껴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우연히 단추가 떨어지면서부터였다. 입고 나올 때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어느새 위에서 두 번째 단추가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영화 ‘클리프 행어’의 한 장면처럼 매달려있었다. 문득 같은 셔츠를 한 장 더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껴 입어야겠단 생각이 스쳤다. 단추는 미리 떼어버린 뒤, 주머니 속에 잠시 보관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여기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전형적인 플롯대로.


  단추가 떨어졌던 시기는 작년 가을 즈음으로 기억한다.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동안 의식적으로 입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서부터는 종종 손이 가더라도 스웨터 안에 껴입다 보니 굳이 단추를 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어차피 티도 나지 않는 데다 귀찮아서 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심지어 단추도 서랍에 잘 두었단 말이다. 단추에 발이 달려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 내킬 때 달아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단추는 기억 속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멀어지듯, 흘러가며.


  어느덧 계절은 바뀌어 봄이 되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사이 집을 옮겼다. 짐을 싸며 한 번, 풀면서 한 번 더. 셔츠에 눈이 갔지만 단추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어먹었다. 어찌하여 아끼겠다는 핑계 하나만으로 그리 매정하게 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러다 며칠 전, 6월이 되어서야 문득 셔츠가 생각나 꺼내 들었다. 내일 입기 전 다리미로 한 번 펴주어야 되나 싶어 옷걸이를 들어보는데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 한 곳이 휑했다. 그제야 비디오테이프 감듯 일련의 사건들이 생각나버려 아연해졌다.  


'걱정하지 말자. 서랍 속에 잘 보관해두었으니까. 심지어 그 서랍은 서랍채 그대로 봉해 이사 왔었고. 그냥 오늘 단추를 달고 다림질을 하면 다시 모든 일이 완벽해지니. 호들갑 떨지 말자. 거봐, 귀찮음도 극에 달하면 최고라니깐? 따로 짐을 싸지 않고 서랍 통째로 가져오니 얼마나 좋아. 어디 사라졌을 리도 없고. 서랍 속에 단추가 없는 게 더 어렵겠다.' 


   하지만 둘째 가면 서러워할 ‘귀차니스트’께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고야 말았다. 단추가 없다. 없어졌다. 꽁꽁 봉해진 서랍 속에서 마술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사 중 이리저리 흔들리다 다른 칸이라던가 위치로 흘러들었을까 칸칸이 빼내어 살피었음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서랍 안에 두었던 것은 맞았을까. 확신에 금이 가자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 없어졌다. 다른 서랍이었나? 아니면 이전 집에 딸린 서랍에 두고 왔나? 혹시 어디에 휩쓸려 같이 버렸나? 애초에 단추를 서랍 속에 두기는 했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지막 희망으로 셔츠 하단 상품 태그에 여분의 단추가 달려있을까 했는데. 희망은 희망사항에 그쳤다. 역시 옷은 비싼 게 최고인가 보다. 여분의 단추 하나 정도는 달아줄 수도 있었지 않나. 단추 하나 달아주는데 마진이 얼마나 깎인다고. 원가 절감을 위해 여분의 낙하산까지 빼버린 셔츠라니 매정하다.  


매정한 간판.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제일 위에 달린 단추를 떼어 그 밑에 달았다. 주의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하고 넘기거나 원래 그런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줄 것이다. 본인이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어 문제이지. 다른 단추를 달아볼까 싶다가도 포기했다. 은근히 특이하게 생긴 단추라서. 그냥 달아주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설마 그리될까 싶어 내키는 대로 두었더니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놓치면 놓쳐버린다. 주저하다간 시들먹해지고 그대로 흘러가버린다.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어떻게든 비슷하게 되돌려 볼 수는 있겠지만. 더 큰 고통과 소요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 타이밍을 매번 놓치는 이유는 ‘인생은 눈에 띌만한 수신호를 보내주지 않아서’다.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채야만 한다. 반년에 걸쳐 단추를 꿰매어야겠다는 생각은 몇 번이나 했었다. 문득 셔츠에 손이 갈 때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미뤄왔을 뿐이고 타이밍도 그와 함께 흘러갔을 뿐이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놓쳐버린 타이밍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가장 아끼던 검정 셔츠에는 단추가 하나 없다. 단추에 발이 달렸는지, 끝끝내 제 자리를 찾아주지 않았던 주인에게 서운했었는지.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타이밍을 기다린다고 하여 무조건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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