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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Feb 04. 2020

고양이는 최고야.

늘 짜릿해.


‘삑삑 삑삑-‘

‘애옹-‘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집사를 애타게 찾는 고양이 소리가 귓가를 채운다. 영화 속, 주인공 고모에게 잡혀있던 카메라 시선이 전환되자 현관 입구가 어스름하게 들어찬다. 문이 굳게 닫힌 후 약간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주인공이 집 안에 들어선다. 뒤이어 고양이도 집사의 발걸음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들어온다. 현관까지 쪼르르 마중 나간 모양이다. 고양이가 주인공 다리에 꼬리를 부비적거리자 그녀는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쪼그리고 앉는다. 지금의 일상이 매우 익숙하다는 듯 동거묘 머리를 쓰다듬는다. 뒤이어 등장한 고모와 주인공이 한담을 나눈다. 고양이는 집사 손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에 빠져들다 고양이에 정신이 팔렸다. 십 여 초 남짓 등장했던 고양이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고양이 그 자체’라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 집중해야 한단 사실마저 잠시 잊은 채, 저 아름답고 도도하며 치명적인 작은 생물체만 쳐다보았다. 도어록 소리에 후다닥 달려와 야옹거리는 순간부터 집사 다리에 부비적 거리며 반겨주는 장면까지 전부 공감할 수 있으니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물 배우들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 일진 알 수 없으나 저 고양이만큼은 헐리웃 톱스타 뺨칠 정도, 고양이 일상 그 자체를 연기했다. 저 정도면 생활 연기의 달인급이지.


영화는 '윤희에게'. 매우 좋았다.


   곁을 내주지만, 금방 손에서 벗어나는 도도함. 밀당의 귀재. 시야에서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여전히 배경음으로 깔리는 저 골골거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주인공과 고모가 서너 마디쯤 나누었을 즈음, 고양이는 그 짧은 새 볼일 다 보았다는 듯 주인공 손을 떠나 유유히 카메라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골골송은 끊기질 않는다. 결국 오디오로만 남은 흔적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피식 웃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감마저 사랑스러우니까. 그런데 뒤이어 옆 자리에 앉아있던 완벽한 타인에게서도 옅은 웃음이 피어나는 게 아닌가? 분명 같은 지점에서 공감하여 웃은 게 분명했다. 영화 상에서 웃음이 터지는 장면도 아니었으며, 상영관에서 딱 두 명만 웃었다. 심지어 이쪽을 따라 웃은 게 아니라 거의 동시에 터졌다. 옆 자리 분의 일상에 대해 알 순 없으나 고양이와 함께 하셨거나 사랑하시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고양이를 사랑해야만 웃을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괜스레 반가웠다.


   고양이란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무언가에 이 정도까지 맹목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짝사랑이다. 특히나 길고양이들은 죽어도 이쪽에 곁을 내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예를 들자면, 집에 고양이를 들이지 못하는 딱 하나의 이유가 ‘평생 그 친구를 매일같이 귀하게 여기고 아낄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질 못해서다. 게으르고 무딘 주제에 또 까칠하여서, 동거묘 평생 동안 잘해줄 자신이 없는 탓이다. 덕분에 짝사랑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다. 짝사랑이 직업이라면 억대 연봉을 받을 자신도 있다.  


나에게 뾰루퉁하고 관심없어도.


   주위를 둘러보면, 유독 길고양이들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이 있다.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했길래 ‘인간 캣닙’으로 태어나셨냐 묻고 싶다. 만약 길가에서 마주친 고양이를 쓰다듬는 날이 온다면, 심장을 부여잡고 울면서 편의점에 갈 거다. 고양이님께 바칠 공물과 로또 한 장을 사서 나와야지.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은 경계심이 짙다. 원체 독립적인 친구들인 데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이 몸께선 특별 경계 대상 1호다. 한 발자국 다가서면 두 발자국 멀어진다. 그들은 이쪽의 시선을 절대 피하는 법이 없다. (고양이가 배를 깔고 누운 채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있다면, 그건 싸우자는 얘기란다. 출처는 불분명하다.) 혹시나 해서 또 한 발자국 다가서면 세 발자국 멀어지신다. 결국 이런 식으로 애만 태우다 끝난다. 이럴 거면 애초에 그렇게나 귀엽지나 말던가.  


   길을 걷다 마주친 사람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당신이 사랑하는 세 가지를 3초 안에 대답해주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십중팔구 커피와 평양냉면, 그리고 고양이를 외칠 거다. ‘남은 생에서 셋 중 하나를 꼭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실 건가요?’라고 되묻는다면, 그 사람을 한 번 째려봐주고 건조하게 평양냉면이라 답할 거다. ‘그럼 남은 둘 중 하나를 또 지워야 한다면요?’란 말에는 그 사람 멱살을 잡고 꺼지라고 할 거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라고 쏘아붙이면서. 나에게 고양이는 그런 존재다. (그렇다고 평양냉면을 인생에서 버려도 된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대체 고양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을까? 굳이 따지자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우신 분들이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시크한데 귀엽고, 멍청해서 귀여우시며, 이쁘니까 귀엽다. 그냥 귀여우셔서 귀여워할 수밖에 없다. 귀여움 그 자체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듯, 세상 귀엽지 않은 고양이도 없다. 만약 그런 고양이가 이 세상에 계신다면, 그분께선 고양이가 귀엽지 않은 우주 저편의 지옥에서 이곳으로 불시착하셨음이 분명하다. 너무 유난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 고양이를 좋아하는데도 특별한 계기가 없다. 고양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성격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저 자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고양이에게 이쁨 받지도 못하고 함께 하고 싶단 결의도 매번 꺾여버리지만, 지금 거리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다. 어쩌다 마주친 고양이와 눈만 마주쳐도 감사하며 인사를 한다. 몇 년에 한 번씩 너그럽게 다가오신 뒤, 바지에 부비적거려주실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힘들고 지친 와중에도 핸드폰에 저장된 ‘움짤’들 몇 개에 녹아내릴 줄 아는 팔불출이다. 먼지에 취약한 호흡기지만 최소한 고양이 알레르기는 없음에 감사하다. 그만큼 고양이는 최고의 생명체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은 소확행이 아니다. 고양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신단 사실 그 자체가 소소하고 사소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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