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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pr 05. 2020

평양냉면으로 추억 읽기.

필름 사진으로만 남게 될 또 다른 추억.

  평양냉면 맛집, 을지면옥 자리가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시 휴업할 분위기다. 확정된 안은 아니나 재개발 때문에 노포를 허문 뒤 신축 건물을 세워 입점할 계획이란다. 도시 미관이라던가 안전 같은 부분은 전문 분야가 아니니 필요해서 하는 거라 믿고 있다. 그 주변 일대 재개발과 관련, 꽤 오랜 시간을 들여 협의하고 있단 뉴스들을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설마 무분별한 계획을 강행하며 저 많은 언론까지 관리하진 않을 테니. 어쨌든 철거가 시작되면 잠깐의 안녕 후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런데 휴업 소식을 들은 뒤부터 뭔가 아쉽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데, 어딘가 간질간질하다.  


이런 느낌은 이제 사라지겠지.


  노포가 주는 신뢰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퇴적된 호수 표면과 같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풍경을 바라보듯,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게 되지. 그러다 보니 을지면옥과 다시 마주할 때가 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바뀐 외관뿐만 아니라 맛에 대한 걱정도 있다. 그동안의 맛과 분위기를 지켜주겠지 싶다가도,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맛이 바뀌어 발길을 돌리게 된 추억들도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이 바뀌진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자리를 옮기면 맛도 변하는 곳들이 있었다. 피맛골에서 먹던 단골 해장국집이 그랬으며, 용산 갈 일이 없어도 굳이 핑곗거리를 만들어 들르곤 했던 단골 떡볶이 가게가 그랬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평양냉면을 사랑하는 입장에선, 이번과 같은 일은 언젠가 마주할 일이었다. 신흥 강호들도 많지만, 몇십 년은 족히 그 자리를 지켜 온 전통 강호들은 대부분 노포니까. 언젠가는 그 자리를 허물고 새로이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안녕을 고해야 한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아우라라던가, 세월이 녹아내려 살짝 눅진해 보이는 식탁과 의자, 허름하지만 정갈한 분위기, 신뢰가 샘솟는 육수 주전자 흠집까지도 말이다.  


을지면옥의 세월.


  남들이 봤을 땐 유난 떠는 걸로 보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을지면옥 평양냉면을 최고로 치지도 않는 터라, 지금의 아쉬움이 살짝 욕심 같기도 하고 말이다.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을지면옥이 '최애 맛집'이 아니라는 개인적 견해에 을지면옥 관계자께서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인 데다 을지면옥의 맛 역시 너무나 미치도록 훌륭하니까. 단지 미묘한 디테일에서 조금 더 선호하는 맛들이 생겼을 만큼 평양냉면을 많이 먹어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괜히 이렇게 투정 부려 보는 데는 결국 ‘추억’이란 단어를 집어 들 수밖에 없다. 이번 생애 첫 번째 평양냉면이 을지면옥이라 괜히 이러는 거다. 어느 날 문득 평양냉면을 먹다 문득 첫 번째가 떠오른다면, 다신 찾을 수 없는 그냥 그 공간이 그리울 거 같아서다. 덕분에 처음으로 방문한 놀이동산에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또 한 가지, 을지면옥을 추억하다 보니 이 곳을 좋아했던 또 한 가지 이유가 생각났다. 을지면옥은 제육, 혹은 수육 반 접시가 메뉴에 있다. 덕분에 혼자 가서도 평양냉면에 제육 반 접시, 소주 일 병에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만두 반 접시는 팔아도 은근히 제육, 수육 반 접시는 팔지 않는 곳들이 많아 더욱 소중했던 곳이다. 나 같은 먹보에게 한 접시 자체가 어려운 일이 아니나 혼술 하기에 양도 많고 가격도 부담스러우니깐. 평양냉면 한 그릇에 인심 후해 보이는 제육 반 접시. 살짝 쳐진 고춧가루와 송송 썰린 쪽파가 정겨운 그곳. 시원하고 삼삼한 육수와 면발은 말할 것도 없지. 맛도 맛이거니와 괜히 노포가 가지는 분위기 덕분에 소주 한 병이 달다. 마음이 편안하다. 고향집이라던가 할아버지 댁에 온 기분이 딱 이거니까. 글을 쓰며 입맛을 다시다 보니, 새삼 깨닫는다. 잊고 있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을지면옥을 진짜 좋아했구나.

 

  코로나로 외식을 삼가는 요즘. 깔끔하게 떨어지는 을지면옥의 첫 육수와 감칠맛도는 수육 생각이 간절하다. 처음으로 만났던 너와의 추억을 지금 이 순간 만날 수 있다면. 마스크로 답답한 속을 뻥 뚫어줄 것만 같다.  


그곳의 풍경들.


P.S: 사회적 거리두기로 평양냉면이 간절하실 분들을 위한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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