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드라마를 보는 내내 평양냉면이 떠오른거야.
진주: 냉면 좋아하시는구나?
범수: 면은 다 좋아해요. 뭐, 면요리 싫어해요?
진주: 아뇨, 라면, 짜장면... 뭐 다 좋아하는데 평냉은 처음이라.
범수: 라면도 좋고, 짜장면도 좋은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오래 살 수가 없어요. 평양냉면이 없거든. 근데 이게 처음이라니. 어우 삼십 년이 아까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먹어요.
(진주, 한 입 먹고선 의아하게)
진주: 음…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 드라마, 멜로가 체질 7화 중에서.
진짜 재밌게 챙겨보던 드라마가 종영했다. 다음 주가 없단 사실에 슬플 정도다. ‘멜로가 체질’이란 제목의, 16부작 드라마였다. 요 몇 년간 마지막 화까지 챙겨본 드라마는 손에 꼽는다. 그마저도 점차 흡입력이 떨어져 의리로 봐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용두사미로 끝나버려 김이 새버린 경우도 있었고. 근데 정말로, 몇 년 만에, 다음 주를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드라마를 만났다. 그게 ‘멜로가 체질’이었다. 내용도 내용인데, 극 중 대사나 내레이션이 너무 찰졌다. 본인이 갖고 싶은 문체로 호흡하는 드라마는 또 처음이라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큰 갈등도 없는 흐름인데 묘하게 당긴달까. 자꾸자꾸 보고 싶고, 보고 있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사랑에 빠져버린 나머지 평소 좋아하던 무언가와 닮았다 생각했었는데, 7화를 보다 깨달았다. 아, 이 드라마 평양냉면과 같구나. 그래서 이 드라마, 매력이 터지다 못해 폭발하는구나. 대본을 쓰셨을 작가님께도 호감도가 상승했다. 7화의 평양냉면 씬에서 이런 대사를 쓰시다니. 이 분도 평양냉면 꽤나 좋아하시겠다 싶어서.
오늘날 본인의 ‘최애’ 음식을 뽑으라면 두 말 없이 평양냉면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냉 예찬론자’, 소위 ‘평냉러’는 아니었다. 나는 함흥냉면 계열에 길들여진 몸이었다. 윗동네는 모르겠으나 아랫동네, 특히 부산 근방은 함흥냉면이 우세했다. 어렸을 때는 ‘조박사’란 체인이 동네에서 흥하기도 했었고. 부모님께서 냉면을 좋아하신 덕분에 조박사 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자연스레 입에 익었다. 대학 때문에 서울로 상경한 후에도 종종 냉면을 찾아먹었다. 나름 고향을 떠올리며 먹을 수 있는 향토 음식이 밀면이나 돼지 국밥인데, 서울에선 그 맛을 살릴 줄 아는 ‘진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서울에는 냉면 잘한다고 소문난 집들은 많았으니까. 되려 오장동에서 회냉면을 먹어본 이후부턴 함흥냉면이 소울 푸드에 가까워졌다. ‘역시 냉면은 새콤달콤 자극적이고 면도 질긴 게 생명이지!’가 모토였다.
(냉면집 밖에 서있던, 진주. 계산하고 나오는 범수를 보며)
진주: 돈 냈어요?
범수: 냈죠.
진주: 아 돈을 내고 먹는 거였나. 아무 맛도 안나길래.
- 드라마, 멜로가 체질 7화 중에서.
TMI: 극 중, 나오던 평양냉면 집은 진미 평양냉면이었다. 어복쟁반으로 유명한 집인데 평냉도 참 잘한다. 언제 가도 사람이 참 많은 게 딱 하나 슬픈 집이다.
청소년기부터 습득한 ‘함흥냉면 DNA’가 언제부터 평냉으로 유전자 조작을 당했던 걸까? 그 계기를 떠올려보니 존박이란 가수 때문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의 유학파 가수였는데 우연히 평양냉면을 먹은 뒤로 중독이 되었단다. 그 당시 인터넷에서 존박은 평양냉면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한국말 어눌한 유학파 캐릭터와 밍밍하고 슴슴한 맛의 평양냉면은 재밌는 조합이니깐.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평양냉면이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저러나 싶었다. 함흥냉면의 오른팔, 왼팔 격인 식초와 겨자를 평냉에 뿌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말하는, 단호한 그의 눈빛이 약간 멋있기까지 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자취방을 뛰쳐나왔다. 몇 군데를 검색해본 뒤 나름 오장동과 가까워 익숙해 보이는 가게로 향했다.
아직도 첫 평냉의 강렬했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을지면옥’이란 이름의, 매우 오래된 노포. 가게 분위기에서부터 전통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혼자서 이런 가게에 냉면 한 그릇 하러 오다니. 대단한 미식가가 돼버린 기분에 휩싸였다. 제육 반 접시에 평양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청하 혹은 소주 한 병도 시켰다. (대낮인 데다 술이 약한 편이라 청하였을 확률이 높다.) 제육이 먼저 나와 술친구를 해줬다. 깔끔하기보단 투박한 쪽이었는데, 약간 고향의 맛이라 좋았다. 이윽고 등장한 오늘의 주인공. 여태껏 먹어왔던 냉면과는 달라 보였다. 국물이 노랗지 않고 묘하게 희끄무레한 데다, 고춧가루가 동동 떠다니는 모양새가 신기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존박의 소울푸드, 평양냉면이란 친구군. 보통 냉면을 먹을 때처럼 그릇을 들고 국물부터 한 입 했다. 한 모금 하긴 했는데 내가 뭘 먹은 건가 싶어 당황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입. 처음 먹었을 때의 그 맛이 맞아 경악했다. 이걸 돈 내고 먹는다고? 이게 소울푸드라고?? 이게 만 원이 넘는다고???
범수: 자, 이제 오늘 먹었으니까 우리 경과를 두고 보죠.
진주: 아니, 뭐 한약 먹은 것도 아닌데 경과를 두고 보나요?
범수: 이 음식이 그래요. 뭐지 이거? 하다가 다음날 갑자기 생각나. 그때부터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거든. 아마 오늘 밤에 자다가 생각날 수도 있어요. 하.. 뭐지 이거....? 평냉이 먹고 싶어...?! 막 이런다니까?
- 드라마, 멜로가 체질 7화 중에서.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무(無) 맛이었다. 밍숭맹숭보다도 옅었다. 그냥 물은 분명 아니긴 한데. 뭐랄까, 면을 삶고 나온 물을 실수로 차게 식혀 그대로 나온 느낌? 이걸 식초, 겨자 없이 먹는다니. 차마 이게 제대로 나온 거냐고 물을 용기는 없어 꾸역꾸역 먹었다. (몇 주 뒤, 다른 가게에서 한 번 더 먹어보고 나서야 평양냉면이 원래 이런 맛이란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술이 매우 달았다. 아, 이 값싼 서민의 눈물에도 이렇게 깊고 다양한 맛의 스펙트럼이 있었구나. 술맛을 그 날처럼 깊게 느낀 날은 처음이었다. 값을 지불하고 나오는데 제육에 술값만 계산하고 싶었다. 그 뒤로 티브이에 존박이 나올 때마다 괜히 그가 미웠다.
그런데 사람일이라는 게 참 신기도 하지. 그렇게 평양냉면에 크게 대였던 친구가 평냉에 죽고 못 사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드라마의 대사처럼 일 년쯤 지났을 언젠가의 평범한 날, 문득 평양냉면이 먹고 싶었다. 뭐지? 내가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고? 헤어진 연인과의 거지 같았던 현실은 다 잊은 채, 좋았던 추억만 그리워하는 일과 비슷한 걸까? 혹은 입맛에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일어났던가. 다음날,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지만 여지없이 데이고 나왔다. 여전히 돈이 아까웠다. 같이 시킨 만두가 없으면 어쩔 뻔했나. 이젠 정말로 다신 먹을 일이 없겠다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또 평양냉면 생각이 났다.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가게를 바꾸어봐도 매번 실패하고 입에 맞지 않는데. 그저 돈이 아까운 맛인데. 어째서 자꾸만 생각이 날까? 그리고 생각나는 주기는 왜 또 점점 짧아지는 건데? 그렇게 점점 평양냉면 늪에 발을 담갔다. 사랑에 빠져버렸다. 존박을 미워했던 순간들이 조금 미안해졌다.
평양냉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평냉에 한 번 빠지면 출구가 없다고. 나도 생각한다. 나는 남들에게 평양냉면처럼 출구가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참 평양냉면 같은 사람이군요’라고. 그러면 난 그 말을 평생 동안 추억하며, 이번 생은 성공했다는 마음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자신이 있다. 이게 평양냉면을 사랑하는 사람의, 평양냉면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사랑의 크기다.
평양냉면을 닮은 드라마가 종영해버려서 슬프다. 이제 무슨 낙으로 금요일 밤을 기다리나 싶다. 하지만 괜찮다. 드마라는 끝나버렸지만, 나에게는 평양냉면이 있으니까. 평양냉면은 내 인생에서 끝나지 않을 드라마니까.
덧붙이는 말. 쓰다 보니 분량 조절 실패로 몇 회 분으로 나누어 올릴 예정입니다. 쓰다 보니 깨달았네요.
제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마음이 제 생각보다도 더 크고 거대했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