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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Dec 03. 2015

흑백필름 이야기_#3.

사진을 찍게 된 이유.

  아주 어렸을 적, 영종도인지 용유도인지 모를 한 섬에 놀러 가며 할아버지께서는 카메라를 챙기셨다. 수동 렌즈가 달린 커다란 SLR 카메라를 다루는 손이 멋져 어린 마음에 나도 찍어보고 싶다 보챘던 추억. 당신께서는 내가 이해할 리 없는 카메라 작동법을 굳이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셨다. 나는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며 목에 걸린 내 머리 만한 카메라를 만지다 문득 갯벌 위에 스러진 목선이 맘에 들었다. 내 생애 첫 사진. 우연찮게 초점과 조리개가 들어맞았는지 어린 눈에는 근사한 별처럼 박혔다.

함께 걷기.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멀어진 당신과 나의 거리는 0에서부터 출발했다. 당신을 꼭 닮게 빚어진 손주가 지방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당신과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물리적 척도뿐만 아니라 다음 손주와의 십 년 터울 동안 당신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첫 손주의 특권은 독점적이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 손수 끓여주시던 라면은 평생에 나밖에 먹어본 일이 없는 오로지 나만의 수제요리였으며 당신께서 처음으로 부엌에서 손에 물을 묻혀보신 경험이셨단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얼마 전 할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했다. 당신의 시간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카메라를 통해 보셨을 순간들도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께 많은 취미가 있으셨던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중에 사진도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 때 처음 알았다. 명암으로만 남겨두신 추억을 한 장씩 넘겼다. 사진을 찍어오며 줄곧 원하던 색감과 구도가 내 나이 즈음의 당신 손에서 펼쳐진 장면들을 보다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진에 대한 나의 뿌리 역시 당신에게서 왔을 수도 있겠다고.

누군가에게는 처음 넘는 문턱.

  사실 내가 닮았던 것은 할아버지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만큼 많은 것이  녹아들었다. 식성이나 관심사 등등 많은 것들이 닮아갔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당연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진은 내가 기억하는 한 찍으시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지만 내가 추억하지 못하는 당신과의 시간이, 혹은 이미 지나쳐온 당신의 시간이 거슬러 올라 내 흐름과 함께였을 수 있겠다 싶었다.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억측이라 하기엔 무언가 분명한 그 시간들이.


  한줄기의 물은 이미 땅에 새겨진 길을 그대로 걷는다. 그러다 다른 줄기들과 이어지면 이미 걷던 길을 지워버리고 다른 길을 걷는다. 사람 간의 관계도 이와 같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녹아들고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길을 걷는다. 전에 새겨졌던 길은 희미해지고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 모습이 온전히 내가 된다. 나는 할아버지를 닮아갔고, 당신께서는 나를 품고 부엌문을 넘으셨던 것처럼. 할아버지께서는 사진 찍는 것 마저 닮아버린 나를 아셨다면 흐뭇해하셨을까?

물줄기는 이어진다.

  내 손을 붙잡고 걸으시다 보면,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질문을 매일같이 받으셨다.


늦둥이 인가 보네요?
아들이 아버지를 꼭 빼다 닮았어요.


  당신께서는 언제나 내 손을 다시 한번 힘껏 쥐신 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 허허로운 웃음이 참 좋았다.


  내 사진으로는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그 옛날의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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