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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Mar 10. 2019

[오늘의 책일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위스키보단 맥주가 어울리는 글 입니다만.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 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 졌다. 그래서 신주쿠에 있는 기노쿠니야에 가서 만년필과 원고지를 사 왔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 줄곧 일에 쫓기는 나날이어서, 글자라고는 세금 신고 서류나 가끔 쓰는 편지를 제외하면 거의 써본 적이 없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니고 정말 그랬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작가의 말 에서. -


   저는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거나, 좋아하지 않게 된 작가들도 있지만, 작가가 쓴 문장 대부분을 좋아하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 김영하, 박민규 작가님 정도입니다. 그중에서 제 삶에 영향까지 미친 작가를 뽑자면 하루키입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위스키와 재즈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을 정도니 말이죠. 조깅만은 늘 좋아해 보려고 시도하는 선에서 그치지만요.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친구의 추천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영화 ‘파이트 클럽’의 원작이자 동명의 작품인 척 팔라닉의 소설과 상실의 시대를 추천받았습니다. 그때는 파이트 클럽 쪽을 더 좋아했죠. 하루키의 글은 중학생 때보다 지금이 더 좋고 공감됩니다. 짧은 호흡과 문체가 일단 좋고 딱 한 가지를 꼽기는 어렵지만 책 전체가 좋고 맘에 듭니다. 왠지 주위에 있을 법만 한 이야기 같기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나오는 위스키나 재즈 음악을 궁금해하고, 또 소비해보기도 했죠. 이제는 알아서 찾아 마시고, 들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고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미지 출처: 예스24 웹페이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하루키의 첫 장편 소설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다른 소설과는 약간 다른 맛이 있습니다.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위스키가 어울린다면, 여기의 등장인물들은 맥주가 어울립니다. 맥주를 마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도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등장인물들과 처해 있는 환경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라기보단 여기가 시초이겠죠. 그래서인지 바 혹은 펍에서 ‘나’와 ‘쥐’가 맥주를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는 문장들이 많습니다. 무언가 해야겠다라던가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 까지는 성공하지만 쉽사리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행동이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대학생인 ‘나’가 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와 바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을 중퇴한 ‘쥐’와 대부분의 시간을 맥주를 마시는데 소비하고, 바의 화장실에서 취해 쓰러진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와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그립니다. 소설 내내 ‘공허’나 ‘상실’적인 부분을 다루지만, 그 누구 무엇하나 각자의 공허나 상실의 정체를 솔직히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본인들의 상태를 정확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고요. 


   저는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명확하지 않은 공허나 상실의 주제가 되려 현실적이고 공감되어 좋습니다. 저는 나나 ‘자아’의 실체에 관심이 많지만 딱 그 정도입니다. 왜 내가 이런 기분에 휩쓸리고 감정을 소비해야만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애초에 그 정의 자체가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는 있는 걸까요? 그래서인지 하루키 소설의 기시감과 모호한 구석이 좋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8월 같았던 오키나와의 5월에서. 필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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