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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pr 15. 2019

[오늘의 책일기]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알다가도 모를 그 무엇에 관하여.

   저는 그림이나 사진을 좋아하지만 그 앎의 깊이는 매우 얕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의 경우에도 무언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좋아하는 쪽이지 남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특히 현대 미술의 경우에는 작품 자체부터 너무 어렵고요. 무언가 난해하게 다가오다 보니 왜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표현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 현대 미술 쪽은 마크 로스코란 작가를 유일하게 좋아합니다.) 공부를 하면 좀 더 나을 수 있겠지만 미술까지 공부하고 싶단 마음은 쉽사리 생기질 않고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도 않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애를 글로 배우는 기분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라 해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대학교 때 교양으로 사진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사진에 취미를 붙이기 전이었지만, 잘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나름의 호승심으로 도전했었습니다. 실제로는 찍는 법보다 원리나 역사 쪽으로 많이 배웠고 수강한지도 오래되어 많이 기억나지 않지만, 초기 사진 분야는 예술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쪽이었단 류의 내용은 생각납니다. 당시 주류 문화 입장에서 사진은 작가의 손보다 눈이 많이 요구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회화와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진을 회화의 틀에 넣고 제한하려 했을 수도 있고요. 분명한 점은 좋든 싫든, 맞든 틀리든. 사진은 그림과 같으면서도, 매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사진과 영화처럼 기술적 복제가 가능하고 그 원본성이 모호한 분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의 책입니다. 과거의 회화, 조각 등의 예술 작품에서 ‘복제’는 ‘모작’을 의미했습니다. 모작이 도제식 수련의 일환이든, 원작자 본인의 작업이든 정말 똑같이 원작을 표현해 내더라도 원작은 원작만의 ‘아우라’를 상실하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복제품은 원작의 ‘바로 여기’에 있다는 ‘현존성’과 시간과 역사 등에 따른 ‘진본성’을 갖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복제품은 복제품만의 역사를 가질 수 없죠. 소유자 본인에 있어서는 나름의 역사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원본의 역사에 편입되는 쪽이었습니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미지 출처: 예스 24 웹페이지)


   사진과 영화는 이와 성격이 다릅니다. 사진이나 영화는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고, 원본과 100% 동일 해지는 것도 가능합니다. 애초에 ‘원본’이라는 정의부터 모호하죠. 사진과 영화에 있어서의 ‘원본’은 무엇일까요? 작가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당시의 작품이라던가 처음 인화한 순간의 첫 장, 혹은 필름 원본일까요? 원본을 따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기존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원작의 아우라가 기술적 복제품들에 한해서는 파괴되었고,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이죠. 


   이러한 기술적 복제품들의 ‘원본성’에 대해, 당대의 철학가들은 각자가 가지는 견해대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아도르노란 철학가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벤야민은 그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아우라’ 개념에서 확장되어 ‘이데아’라던가 ‘시뮬라크르’와 같은 개념까지 넘어가버리면 각자의 해석은 그 시대와 개인에 따라 더욱 다양해지고요.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한해 이야기해보면, 과거 예술의 종교적, 제의적 가치에 비해 기술적 복제품은 좀 더 대중들에게 가치가 전달되었고, 대중 역시 예술작품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실천적, 정치적 근거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술이 종교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다고도 하고요. (플란다스의 개 동화에서 주인공은 루벤스의 회화를 보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지만, 교회 혹은 성당에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천막으로 가려놓는다던가 돈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정한 날이라던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공개를 했었고요.)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원본의 ‘아우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전시회에 가서 작품들을 보는 게 좋고, 그게 미술 작품이든 사진이든, 혹은 영화이든 크게 구애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읽는 내내 앞에서 언급했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현대 미술의 작품성과 가격을 이해하지 못했죠. 잭슨 폴락이라던가 이우환, 김환기 화백 등등, 그분들의 작품성과 가치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란 저에게 너무 어려웠으니깐요. 그런데 우연히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작품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에서 피어나는 일렁임이라던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래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지 않는 편인데 유지태 배우님이 내레이션을 맡으셨단 이야기에 빌렸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분의 목소리가 작품과 마주하는 경험 자체를 보다 강렬하고 풍부하게 해 주었고요.) 그때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느꼈던 근원적인 감정이 그 작품의 아우라일 수 있겠습니다. 

마크 로스코, 'Untitled' (출처: 구글). 현대 미술을 정확히 설명할 재주는 없지만, 마크 로스코를 좋아합니다.

   사진 평론가 존 버거는 ‘사진은 주어진 상황에서 실행되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특정한 상황과 순간에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진가의 선택이자 결과라고 하고요. 거기에서부터 회화와 사진의 차이가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은 그 무엇보다 수용자의 해석이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이죠. ‘원본’이라는 아우라는 가질 수 없지만, 각자가 바라보는 사진에 따라 저마다 다른 해석이 붙고 그 사건들에 대한 언어가 생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본문 내용처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사진이자, 사진만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고민해보아도 좋을 이야기]

   저는 눈이 슬픈 배우들을 좋아합니다. 장국영, 양조위, 호아킨 피닉스, 히스 레저, 우리나라에서는 변요한 배우님을 좋아합니다. ‘눈이 슬픈 배우를 좋아한다’는 정의 자체가 연극이나 뮤지컬 등과는 다르게, 영화는 연기자와 소비자 사이에 ‘렌즈’라는 기계 장치가 생겼고 렌즈에 담긴 구도와 시선을 통해서만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회화나 뮤지컬, 연극과 다르게 사진이나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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