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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ug 06. 2019

[오늘의 책일기] 데미안

Yes에도 No에도 빠져들지 않을 용기.

 우리는 세상을 ‘나’와 ‘너’로 구분하곤 합니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있었다는 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와 모든 현상, 그 이면까지도. 우리는 곧잘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죠. 세상을 흑백으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알게 모르게 ‘Yes or no’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쉽고 편리하며 직관적이니깐요. 나와 너, 옳고 그름, 선과 악, 이상과 현실 등등. 동전의 양면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합니다. 반면 그 중간 언저리의 어딘가는 매우 희박하며 눈에 띄지 않죠. 이러한 시선 처리는 현실 밖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 속 가상현실과 실재라던가 Netflix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 속에서의 현실과 ‘뒤집힌 세계’ 처럼요. 혹은 흔해빠진 플롯 속 주인공과 주인공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악당들에서도 만날 수 있죠. 영웅은 핍박과 배신 속에서도 선함을 잃지 않으며, 한 번 악당은 영원한 악당으로 남아 죗값을 치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현실에선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할 수 없음을, 백 퍼센트라던가 완벽이란 단어를 듣는다면 의심부터 해야 한단 사실을 말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위치한 자신을 바라보며 고통받습니다. ‘나’의 경계를 명확히 알지 못하거나 ‘너’의 손에 들린 고기가 더 커 보여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두 세계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속 주인공 역시 두 세계 사이에서 헤맵니다. 자아의 경계를 찾으려 치열하게 탐구하죠.


데미안. (이미지 출처: 예스 24  웹 페이지)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선과 악, 두 세계의 공존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본인은 ‘선’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어둠’에 본능적으로 끌리고 동경한다. 하지만 어둠처럼 보이고 싶어 저질렀던 치기 어린 거짓말 한 마디가 약점이 된다. 실제 어둠과 가까운 삶을 살던 소년, 크라머에게 이용당한다. 실제로 죄를 짓는다. 지어냈던 거짓말과 다르게 자신을 옥죄는 어둠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다 카인과 아벨,  ‘표적’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 하며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전학생 ‘데미안’에게 도움을 받아 그 마수에서 빠져나온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빠져듦과 동시에 신비하고 어둠 같아 보이는 그에게 다가가길 주저한다. 결국 가족들에게 크라머와 있었던 일들을 고해성사하며 밝은 세상에 남기로 결심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가까워지다 멀어지다를 반복하고, 끊임없이 어둠과 어른 세상의 유혹을 받는다. 싱클레어는 그 속에서 좌절하기도,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름 모를 소녀에 사랑이 빠졌지만 말 한 번 걸지 못하며, 그녀를 떠올리다 데미안의 얼굴을 그려낼 때도 있었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의 문구에 고뇌하며 스스로가 알에서 깨고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데미안과 교류하며,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에게 끌릴 때도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배우기도,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하지만 전쟁 때문일 수도, 혹은 그녀 자신의 선택일 수도 있는 결정에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겪어온 사건들과 데미안을 마지막으로 본듯한 전장을 거치면서 싱클레어는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소설 데미안은 저에게 거울과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데미안이 청소년 권장 도서에 속해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죠. 문체나 표현만 어렵고 ‘독후감’에 쓸만한 느낀 점이나 주제 의식을 찾기 힘들었죠. 되려 권장 도서 치고 뭔가 모를 은근한 분위기에 설레며 읽었습니다. 한참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꺼내 본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를 통해 그 나이 때의 본인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쓴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울같이 과거의 모습을 비추었죠. 굳이 어른스러워 보이고 음험한 대상을 동경하였던, 허나 막상 그곳에 발을 디디기는 무서워했던 연약한 나. 부모님과 어른에게 하는 맹목적인 반항이 이 세상과 등지는 독립적 모습이며, 정말로 나다운 모습이라 착각했던 그때. 그로 인한 방황과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했던 노력까지도.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은 스스로의 경계와 위치를 인정하고 납득했을 때야 비로소 깰 수 있었습니다. 채 마르지 않은 병아리 몸 여기저기에는 아직 껍질 부스러기들이 붙어 있긴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거울에 비친 싱클레어의 모습을 통해 과거를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데미안은 ‘빛과 어둠’처럼 반대 편에 마주한 ‘경계’를 많이 다룹니다. 카인과 아벨. 골고다 언덕에서 회개한 도둑과 회개하지 않은 도둑. 예수님과 데미안. 마리아와 이브 등등. 사회적 통념과 관조적 시선 사이에서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싱클레어 스스로도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그 답과 방향성을 찾고 싶어 고뇌하죠. 끊임없이 내면을 바라보지만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못합니다. 때에 따라 긍정하고 부정하며 순응하고 반항합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는 현실이 답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 안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습니다. 이분법적으로 아군과 적군, 나와 너를 명확히 구분한다면 참으로 편리하겠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기에. 싱클레어처럼 ‘나’를 중심으로 한 나침반을 세워야만 합니다. 지금 당장 가까운 이들의 말과 내가 믿고 싶은 일들의 방향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몸이 기울 수는 있겠지만. ‘나’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스스로의 답과 방향성을 갖는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스스로의 나침반이 서있는 모양새를 가다듬어 볼 수 있었습니다.


   삶에 정답은 없습니다. 본인이 내린 정의와 이해를 통해서 현상을 바라보고 그 가치를 평가해야만 합니다. 절대적인 현상은 없으니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물과 사건을 마주해야 합니다. 정말로 나다운 모습은 껍질 밖에서 찾을 수 있되, 그 안에서의 방황도 몸에 붙은 편린까지도 전부 자기 자신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죠. 소설 데미안 속에 담긴 언어들을 제 식대로 해석해본다면 그렇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니까. 우리가 서있는 현재와, 이 곳에 서있기 위해 했던 선택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둘러싸인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척도를 찾고 지켜가는 이야기.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었습니다.




문득, 학교에서 배웠던 시가 생각나 마지막을 채워봅니다.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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