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를 앓다.
부쩍 우울하고 쳐지는 나날의 연속. 간만에 생긴 휴가에 즉흥적으로 미술관에 들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말보다 평일 미술관을 즐긴다. 직장인이 평일에 미술관을 가기 위해서는 피 같은 연차를 소진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훨씬 한적하고 여유롭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특히 인기가 좋은 전시의 경우, 사람에 치이느니 과감한 휴가 소진 쪽을 택한다. 피를 내어주고 마음의 양식을 챙긴다.
이번에 들른 곳에서는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드로잉’이라는 주제로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이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되었다. 평소 알던 작가라던가 작품은 없었지만, 천천히 그림을 둘러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살살 달래어 주었다. 문득 벽 한쪽에 걸린 작품에 시선이 꽂혔다. 큰 캔버스에 보라색 다발 꽃이 핀 들판, 그 가운데에 별처럼 박힌 주황 비니 사내가 그려진 유화. 문득 확신에 찬 탄성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건, 아이슬란드다.
멍하니 그림에 빠져들다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모래 해변의 빙하라던가, 불타는 석양같은 작품이 몇 점 더 펼쳐져 있다. 아무리 봐도 저 그림들의 배경 모두 아이슬란드가 맞는 것 같다. 오른쪽에 몰려있는 작품 설명을 서둘러 훑으니 그중 석양을 품고 있는 바다 그림 제목이 ‘Iceland sunset’이다. 아아, 맞나 보다 아이슬란드가. 내가 떠올렸던 그 풍경들이 맞구나. 가슴에 품고 돌아왔던 그 분위기를 그림에서 찾아내었구나. 확신이 사실로 바뀌던 순간, 엄청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풍경과 정취, 음악, 온 자연의 분위기가 호수 한가운데에 비치는 달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든 그림이 아이슬란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이미 그런 건 상관없어졌다.
2018년. 가슴속에 품고 사는 버킷리스트 네 곳 중 두 번째를 채웠다. 이미 채운 곳은 오키나와였고, 아직 채워야 할 곳은 티벳과 쿠바다. 두 번째로 채운 곳이 아이슬란드이고. 가보기 전까지는 상사병에 앓았고, 갔다 온 뒤로는 향수병을 앓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상사병과 향수병이 동시에 도진 상태이다. 해가 질 줄 모르는 백야의 아이슬란드에 갔던 터라 오로라를 눈에 담고 오지 못한 이유가 하나였고, 상황상 온전히 내 식대로 풀고 오지 못한 여행이었던 게 또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다. 대신 여름을 보고 온 덕분에 그곳에서 흔히 찾을 수 있었던 보라색 꽃, ‘루피너스’가 펼쳐진 그림만 보고도 아이슬란드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아이슬란드가 뭐가 그리 좋다고. 갔다 온 뒤로 더더욱 그리워져버렸고,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살까.
짝사랑하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모든 의미가 무색해지고 미친 듯이 가슴이 설레는 것처럼. 가기 전부터 앓아온 짝사랑은 다녀온 뒤로도 채워지지 않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더 키워버린 채 돌아오고야 만 나는. 그 적막하고 척박한 땅이 뭐가 그렇게 좋았다고. 그럼에도 가슴 시리게 사랑하는 아이슬란드는 메말랐던 오늘의 마음에 봄비가 되어 주었다. 아무래도 난 아이슬란드에 몇 번을 가더라도, 당신의 깊고 차가운 목소리에 빠져 죽을 운명인가 보다.
오늘의 아이슬란드는 지구 정반대 편에 서있는 그림자에 위로의 말로 다가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