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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May 09. 2019

순간을 믿어요.

아니었던 순간들이 모여서.

   어머니께서 환갑이 되셨다. 기념으로 육십 번째 생신 즈음 도쿄에 가고 싶으시다 하셨다. 기념이라기 보단, 가족과 한 번이라도 더 여행을 가고 싶으셨던 마음이셨을 수도 있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들로 한창 심란할 때라 도피성 여행 겸 부모님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나만의 여행이라면 커피와 맛집으로 잔뜩 아로새겨진 구글 지도를 들고 다녔을 테지만. 도쿄는 처음이시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랜드마크 위주로 조정하였다. 넣는 김에 후지산 일일 버스 투어도 신청하고.


도쿄의 랜드마크라면. 역시.


   여행 일정과 버스 예약 가능 일자 간에 딱 하루만 맞아떨어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예약할 때부터 일기 예보가 계속 불안 불안했는데 여행지에 비와 태풍을 몰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 징크스는 이번에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여행 일정 중 절반만 맑고, 나머지는 흐린데 하필이면 버스 투어 날 비가 온단다. 심지어 통계적으로는 여행 가는 달 도쿄 강수량이 제일 적다는데 일정 중 절반이 비라니. 통계 따위는 악운이 박살 내 버렸다. 이제와 취소하기도 애매해 예보가 틀리기만을 기도했음에도. 야속하게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사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린 불가항력임에도 여행 계획을 짠 장본인으로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형량은 무거워져만 갔다. 당신들께서는 괜찮다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하셨지만 아들 된 마음에 또 그렇질 않으니까. (기획자의 직업병일 수도 있고.) 구름으로 두터운 하늘을 보아하니 후지산 없는 후지산 투어가 확정이다. 후지산 바로 앞까지 가는 코스도 아닌 데다, 일정을 소개하던 가이드가 이 정도 비와 구름이면 후지산은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설명에서 확실한 도장을 찍었다.


   이왕 이리된 일을 어찌할 수 없으니 최대한 후지산은 마음에서 비우고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흐린 쪽보다는 맑은 날이 좋았겠지만, 하코네 신사라던가 다른 여행 코스는 그새 잦아든 이슬비와 안개로 또 그럴싸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고. 일일 투어의 마지막 행선지는 하코네 ‘용궁전’ 이라는 온천.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유형문화재이자 온천이란다. 어머니와 만날 시간을 정해놓고,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독을 풀었다. 노천탕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온천물을 느끼다 문득 밖을 쳐다보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다.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노천탕 전경으로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저 멀리 후지산까지도 함께.  


비가 오고 또 흐려서. 마음에 들어찬 하코네 신사.


   뜻 밖의 후지산. 당연히 마주하지 못할 줄 알았던 후지산을 온천물로 노곤해진 두 눈에 담고, 혹시나 어머니께서는 보지 못하셨을까 조금 일찍 탕에서 빠져나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싫어하시는 어머니께서는 온천을 하지 않으셨다. 매점에서 작은 메모지를 빌린 뒤, 음악을 들으며 볼펜으로 창밖 풍경을 그리고 계셨단다. 당신 옆에 앉아 음악을 들어보라며 이어폰을 내어주셨다. 리스트의 피아노곡, ‘위로’. 거짓말같이 갠 하늘과 햇살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강물. 잔잔한 피아노. 지금 이 순간이 선물이었다. 아침의 아쉬움은 사라진 지 오래.


어머니의 스케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기대하다 아쉽고, 아쉬워하다 한 순간 또 맑아진다. 내 것임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마음이니까. 마음에 순간이 닿아 아쉽기도 가득 차기도 한다. 찰나가 전부를 바꾸어 놓을 때도 있고. 이 날이 그랬다. 한 구석이 허했던 하루가 완벽해졌다. 순간순간의 위로가 모여 온전한 하루가 되어주었다.



https://youtu.be/ShiOdiZzfM0

도쿄에서 들었던 liszt consolation no.3 (블라미디르 호로비츠의 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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