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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Jun 12. 2019

지극히 사적인 단어로써의 행복.

행복을 피워내는 순간.

   내 감정의 온도는 한겨울 담벼락 밑에 쌓인 눈과 같다. 볕이 채 들지 못하여 켜켜이 쌓인, 녹고 얼고를 반복해 거뭇거뭇하게 엉겨버린 흔적. 혹은 그 언젠가 누군가의 감상에 젖었을 흔적이나 지금은 그저 겨울이 왔다 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줄. 그 정도의 차가움을 유지한다. 어느새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와 꽃이 피더라도 그늘진 시멘트 바닥 밑에서 ‘겨울 덩어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언 채로 버틴다. 웬만큼 뜨거운 나날들이 이어지지 않는 이상에야 한 뼘 남짓한 공간의 계절은 지난겨울을 그리워한다.  


   평소의 감정이 가라앉아 있거나 쉽사리 녹지 않는다 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무던하며 무디고 평범하여서. 쉽사리 오르거나 더 내려가지 않을 뿐이다. 최초의 적정선을 곧잘 유지한다. 웬만하면 적당히 다 좋고, 어지간히 찔러대지 않는 이상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사실 이러한 감정의 온도와 폭, 궤적이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세상 편하다. 사회생활을 하거나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풍파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에 이보다 단단한 갑옷은 없으니까. 조금은 차가운 갑옷 재질을 피부로 느끼며 관조할 뿐이다. 


   그럼에도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행복에서 밀어내는 이유는 가지지 못한 ‘반짝임’에 대한 본능적 끌림이자 갈구에서 비롯된다. 나는 스스로가 풍부하고 예술적인 감성을 타고난 사람이기를 소망했다. 그러질 못해 늘 자책하는 쪽이고. 마음 깊은 곳 감정의 샘은 처음부터 메말랐으며 치열하지도 못했다. 눈에 들어오며 귀에 들리고 혀에 닿으며 코끝에 스치고 손에 잡히는 모든 순간들의 표현에 감정을 흠뻑 적실 수 있기를 소원했지만. 남들의 감수성 어린 표현을 보며 질투하는 법밖에 배우질 못했다.  


   한 때는 음악을 업으로 삼길 원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에는 타고난 능력의 한계를 탓하며 놓아버렸고 이제 다시는 꺼내 보지도 않는 시절이지만. 실제로 악기를 다루는 능력도 평범했으며 절대 음감도 아니었고 음치도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했던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감성’ 쪽이었다. 유명하거나 위대한 음악가는 언감생심이었으며 당장 주위 사람들에 비해서도 표현해낼 수 있는 깊이나 결이 달랐다. 현상을 바라보고 표현해내는 악상을 따라갈 수 없었다. 노력만으로는 향할 수 없는 길도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은 사진과 글을 정말 잘 해내고 싶다 생각하지만. 내가 가진 ‘반짝임’ 정도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늘 의문이다. 지금은 모르겠다. 모르겠다 얼버무리고 싶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겠다. 남들이 찍은 사진과 글에서는 그렇게 감성이 흘러내리는데. 구태여 드러내려 하지 않더라도 차고 넘치는 감정들이 보이는데. 나의 것은 애써서 쥐어짜야 간신히 눈물 한 방울을 채워낼 뿐이다. 


   그렇기에 삶에서 얼어붙은 감정을 잠시나마 녹여주고 감수성을 자극해줄 수 있는 사건들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토록 원하지만 내 소유만은 될 수 없었던 감정들을 엿보게 되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으니까. 나와 감정 사이를 연결해주는 순간에 집착하고 갈구할 수밖에 없다. 중독에 가까울 만큼. 나에게 있어 감수성의 표상이 짙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는 슬픔과 기쁨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쉽게 감성이 흘러나와 버리는 소재가 영화이다. 손쉽게 찾을 수 있고 빨리 빠져든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그저 그렇게 흘러가버리곤 하지만 몇십 번을 보아도 실패하는 법이 없는 영화들도 있으니까. 음악도 감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좋은 도구가 되어주지만, 사람의 눈은 귀보다 예민하다.  


   가끔씩 코드가 맞는 그림을 보게 되면 감동받을 수 있어 행복하다. 이상하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대목이 있다. 자연에서 감동을 받는 적은 드물지만 음식에 쉽게 감동받는 편이라 맛집을 찾아다닌다. 정말 맛있는 음식이 처음 혀에 닿는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감정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도 없다.  


   어째서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질 못한 것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결핍된 채 나와버린 나로서는, 단 몇 초라도 담벼락에 햇살이 닿을 수 있는 그 시간에 마냥 행복해한다. 




해당 게시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일과삶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정을 들으며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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