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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Jun 26. 2019

요지경 세상을 만화경으로 바라보니 다소 편안합니다.

NETFLIX <블랙 미러 시즌5> 소회.

* 이 글에는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즌5>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X 넷플릭스 브랜드 콜라보레이션'에 참여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도록 진화했다. ‘나’와 ‘남’의 집단을 구분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관계를 맺고 ‘나’와 ‘너’를 알아가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특히 현대인은 사회라던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어졌고.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사회와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이른바 ‘히키코모리’로서의 삶은 거미줄처럼 얽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온라인으로 맺었을 커뮤니티도 사회의 일종이며, 소비하는 문화나 콘텐츠, 하다못해 음식이나 옷, 전기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알게 모르게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완벽한 격리나 홀로서기는 상상할 수 없다. 본인이 굳게 다짐하였다고 해도 사회는 그들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현대인은 관계를 맺지 않고선 살 수 없다’는 말이 사회를 이루는 기본 원리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뉘앙스로 들릴 수도 있겠다. 허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기본 원리는 과거에 비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관계를 이루기 위한 ‘나’와 ‘너’의 정의. 우리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들. 감정의 소통과 교류. 이전과 같다. 단지 방식과 수단이 변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회적 범주가 닿지 않는 구석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한 개체로서의 ‘내’가 아우를 수 있는 영역은 점차 넓고 얕아지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구석은 깊어졌다. 단적인 예로, 요즘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서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은 생략하는 편이다. 몇 초의 수고로움과 0에 수렴하는 비용만 들여 메시지를 보내거나 SNS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보다 전에는 휴대전화였을 것이고, 언젠가는 삐삐와 집전화를 통했어야 하며, 더 과거에는 꾹꾹 눌러쓴 손편지여야만 했다. 원활히 소통하고 싶다면 만나야만 했고.  


소통에 담긴 욕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블랙 미러는 늘 이러한 ‘기본 원리’를 잃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을 소재로 한 판타지로 보이지만. 그 핵심에는 언제나 ‘나’와 ‘너’에 닿아 있다. 사랑, 갈등, 관계, 자아 등등. 사랑하고 갈등을 겪으며 관계를 맺고 자아를 떠올리는 방식을 지금과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분명 미래를 이야기함에도 현재를 떠올리게 한다. 


1화.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게임의 이름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이 무료해지고 낡아버린 중년의 일상. 거기서 떠올리는 나의 존재.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은 그저 나에게 보다 솔직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성과 동성 간의 사랑. 가슴 설레는 연인과 의무와 책임이란 이름의 가족 간의 사랑. 불륜과 불륜 언저리, 그럼에도 유지되는 관계로서의 사랑. 추억과 현재의 사랑까지. 단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2화. 스미더린. 회사의 이름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근(近) 미래의 에피소드를 표방하는 블랙 미러에서, 어쩌면 전 시즌을 통틀어 가장 현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셜 네트워크에 중독되는 우리. 그 안의 모든 정보가 ‘데이터’라는 이름 하에 통제되는 현실. 정도의 차이일 뿐 지금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까. 삶과 삶을 끊어낸 이유를 소셜 네트워크에서 찾아내려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신기해 보이지도 애처롭지도 경악스럽지도 않다. 코 앞에 들이민 탓에 김이 서려버린 거울. 거기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3화. 레이첼, 잭, 애슐리 투.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자아에 대한 주제를 담았으며 탑스타와 탑스타를 좋아하는 팬, 그 주변 인물들과 인공지능의 관계로 풀어낸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남들이 보고 싶은 나. 관심받고 싶은 나와 관심받고 싶지 않은 나. 이해받고 싶은 나와 이해받고 싶지 않은 나. 인공지능을 소재로 삼고 있기에, 평소 본인이 좋아하는 화두도 살짝 곁들여져 있다. 오늘의 ‘나’를 뇌의 커넥톰 단위까지 완벽히 복사하여 인공지능을 만든다면, 그 인공지능은 ‘나’라고 볼 수 있을까? 뇌만 기계 몸에 옮기거나 데이터화 하여 로봇에 옮긴다면, 나는 그 몸을 진짜 ‘나’라고 인지할 수 있을까? 나를 나라고 인지할 수 있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블랙 미러에서 담아내는 이야기들은 늘 그 존재가 혼란스럽다.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며. 현실 같다가도 SF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보고 나면 늘 잔상이 남는다. 씁쓸한 여운에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처한 현실과 비교하게 되고, 이도 저도 고를 수 없는 선택지에 미아가 되어 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블랙 미러를 보는 이유를 꼽으라면. 피부에 닿을 정도로 현실적이진 않으니 불편한 진실을 덜 불편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블랙 미러에서 다루는 주제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기술과 수단은 고맙게도 현실이 아니다. 최소한 오늘에서 만큼은. 그래서 나는 블랙 미러를 본다. 다소 불편한 오늘을 차마 직시할 자신은 없어서. 거울을 들이밀고 다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다. 


@Photo by Mario Azz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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