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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Oct 20. 2020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입맞춤을 건넸다

Buenos Aires, Argentina

베네수엘라에서 온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조그만 회사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항상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밤이면 극장가를 찾았다. 카라카스의 극장에서 분했던 배우의 경력은 구직 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정치를 잘 몰랐지만, 아마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상황 때문인가 싶었다. 아르헨티나의 우파 정권 아래에서 아르헨티나인들은 그녀의 조국이 처한 상황을 비웃곤 했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본국의 가족의 상황을 바라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텨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결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늦은 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서 들었던 페로타 칭고 Perotá Chingó의 음악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촌 팔레르모 Palermo에 살았다. 팔레르모는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았는데, 시내 한복판에 있는 비샤 31 Villa 31과 같은 슬럼이 근처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입의 대부분을 주거비로 썼다. 여성살해와 같은 폭력이 만연한 일상에서 외지인인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른 아침, 삼십 분의 출근길을 왕복하며 그녀는 진보 없는 삶을 떠날 꿈만을 품었다. 그녀의 손에는 종종 작고한 스승의 시집이 들려있었고,  짧은 시구절만이 그녀의 삶을 위안할 뿐이었다.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고 No vivas pensando/ 삶을 위해 사는 것 vive viviendo/ .../ 삶이란 기억을 담는 것 La vida en lo que la memoria cabe/ 그것은 기억이 원하는 것 es igual a lo que la memoria quiere/ 삶은 오직 그녀 일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La vida solo es ella, nada mas/ 당신에게 입맞춤을 건넨다 te beso.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삶은 어찌 보면 파리와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 젊은이들이 파리의 최하계층 노동을 담당하듯, 부에노스아이레스도 물밀듯 밀려오는 이민자들에게 값싼 노동을 내맡기고 있었다. 부촌과 비샤의 경계선은 허물어져갔고, 밀려오는 이민자의 행렬에 치안은 마비되었다. 곤두박질치는 경제 속에서 힘을 잡은 건 경제 성장의 기치를 내건 우파 정권이었고, 군사 독재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은 아르헨티나는 또다시 가진 자들을 위한 세상이 되었다. 침묵을 강요받는 농민과 이주민과 원주민들. 넓은 대륙에서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나가던 이들은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기호학자 월터 미놀료는 라틴 아메리카를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진 대륙’이라고 불렀다. 드넓은 풍경 속에 자리 잡은 문명은 역설적이게도 본래의 주민들을 착취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대륙의 동남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또한 그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부촌과 비샤가 혼재해 있었고, 그곳에서 원주민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삶은 더욱 부박해져 갔지만, 그 가운데 모두는 버텨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길목들에서 나는 에콰도르인과 베네수엘라인, 콜롬비아인과 페루인을 만났다. 그들은 원주민이 내려놓고 간 조그맣지만 거대한 땅에서 혼종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혼종의 땅에서 사람들은 불행했고 동시에 행복했다. 불안정한 삶은 일상이 되었고 그 가운데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여전히 누군가는 실종당하고, 여성은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춤과 음악으로, 혹은 가장 느린 일상의 발걸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왕자웨이가 해피투게더에서 세상의 반대편에 있다고 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발 디딘 세상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그녀가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녀와 처음 함께 시간을 보낸 날, 우리는 친구들의 시선을 피해 옥상으로 향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회색 벽들은 일몰 무렵이면 태양의 잔상을 머금어 반짝이곤 했는데, 그 벌거벗은 풍경을 옆에 두고 싸구려 와인 잔을 기울였다. 그때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전구색 빛에 잘게 부수어져 도시 전체에 잔상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옥상에 널려있던 이웃의 이불을 넓게 펼쳐 간이 텐트를 만들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텁텁했던 말베크 와인, 그녀가 좋아했던 페로타 칭고의 노래와, 으슬으슬 떨던 우리들. 킬킬대며 보냈던 그 밤의 오랜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요즘 그녀의 인스타그램엔 그녀가 주연한 연극 소식이 올라온다. 그녀는 종종 내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몰을 보낸다. 그녀는 삶을 위해 살고 있을까, 그녀의 기억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을까. 삶은 오직 그녀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입맞춤을 건넸다.  



뒷모습, 내가 만났던 도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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