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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Oct 20. 2020

창녀의 섬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일컬었다

Havana, Cuba

Puta Isla, 창녀의 섬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일컬었다. 오래전 아바나의 영광은 쇠퇴한 지 오래였고, 섬에는 창녀와 도둑만이 가득했다. 처음 섬에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이질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60년대에 멈춘 섬은 문맹과 빈곤을 탈출해 전 국민에게 평등을 선사했지만 남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섬에서 쿠바의 젊은이들은 꿈을 잃고 방황을 했다. 그들에게 쉬이 주어진 것은 자신의 몸, 혹은 더 나아가 영혼을 파는 것뿐이었다. 항상 미소를 품었던 그녀는 어느 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뒤로 한 채 일본으로 떠났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쁘기보다는 한참, 마음이 멍해졌다.


처음 아바나에서 한 것은 매일의 말레콘(방파제)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바나 서쪽 해안에는 바다를 따라 긴 방파제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길이가 도시의 서쪽 바다를 다 감싸고도 남았다. 나는 늦은 아침 집을 나서 말레콘으로 향했고, 앞집의 피자 가게에서 삼 백 원이 채 안 되는 피자를 입에 물고 방파제에 앉았다. 방파제에 앉아 있노라면 다양한 인간 군상과 함께 60년대의 차들을 온종일 구경할 수 있었다. 무선 인터넷이 전무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온종일 고전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중 방파제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헤밍웨이의 책들이었다.


헤밍웨이는 바다를 El Mar이 아닌 La Mar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바다는 여성적이었고, 그 여성의 바다를 헤쳐간 노인은 고래와의 사투 끝에 마지막 귀항을 한 참이었다. 그렇게 품을 내주는 바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많은 이들이 내게 와 말을 건네곤 했다. 원색의 파랑 교복을 입은 소녀들, 노랑과 빨강 옷으로 치장한 아저씨들.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 뒤에 숨어서야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종일 책을 읽다 보면 늦은 일곱 시 경에야 해가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방파제에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밝히는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은 오후 여섯 시 오십 이 분. 743번 째 가로등부터 내가 좋아하는 전구색 등이 켜졌다. 천천히 집에 갈 시간이었다.


쿠바의 그녀는 정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다. 그녀가 한 달을 꼬박 일해 버는 돈은 미국 달러로 삼십 달러, 변호사인 어머니가 버는 오십 달러도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일가족이 팔십 달러로 한 달을 버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부 배급으로 나오는 밀가루와 쌀, 기름과 계란 등이 있으면 끼니는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삶은 기호와 욕구를 말살했다. 기념일에 먹는 고기, 월급의 삼십 분의 일인 맥주 한 캔. 삶은 단조로웠고, 젊은이들은 섬을 떠나려 했다. 푸타 이슬라, 창녀와 도둑이 되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었다. 그저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는 건 그녀에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해 질 무렵의 방파제에 앉아 마지막 맥주를 한 모금하고 있노라면 그녀가 퇴근하고 나를 데리러 방파제로 나왔다. 황혼빛 골목을 가로질러 그녀의 어린 동생을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오면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곤 했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온 가족이 조그만 식탁에 앉아 조촐한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사 온 맥주 세 캔은 어느새 동이 났고, 그녀의 어린 동생은 직접 만든 비눗방울 장난감을 들고 와 내게 놀아 달라며 말을 걸었다. 소플라 로 soplarlo, 이것 좀 불어 봐. 나의 귓가에 아직도 남은 그 목소리를, 일본으로 떠나간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모두가 가난하지 않고 평등하게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뒷모습, 내가 만났던 도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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