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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Feb 14. 2021

1984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포로, 노획품, 사살자 등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바깥의 환호성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웨이터들도 다시 분주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웨이터가 진이 든 병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왔다. 윈스턴은 잔에 술이 채워지는 것도 모른 채 행복한 몽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펄쩍펄쩍 뛰지도, 환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의 영혼은 흰눈처럼 깨끗해졌다.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 피고석에 앉아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다. 그는 햇빛 속을 걷는 기분으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무장한 간수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이 1948년에 그려낸 디스토피아적 세상은 이미 당도해 있는지도 모른다. 오웰이 그렸던 것처럼 적나라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빅 브라더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세상은 정보 그리고 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가고, 그 움직임은 빅 브라더의 텔레스크린보다 더욱 정교하게 우리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구글과 애플,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를 통해 편의를 얻는다. 우리가 조금의 편리함을 위해 양도하는 정보들은 빅데이터로서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게 가공되고, 다시 우리의 모니터 앞으로 정제된 정보로써 제공된다. 우리의 이동 데이터, 검색 데이터, 소비 데이터는 익명으로서 존재하지만, 가장 개인적이고 식별 가능하며, 이를 통해 한 사람을 유추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는 불특정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기록되는 이동 데이터로 유저를 추론해냈는데, 모든 정보가 전체 공개되는 웹과 앱의 세상에서 한 사람을 특정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보를 너무 헐값에 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기실 민주주의의 사회에서도 이처럼 정보는 가공되고 자본주의의 원료 역할을 해낸다. 그런데 이 정보가 독재 혹은 전제주의 정권과 만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조지 오웰이 그렸던 디스토피아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정보가 검열되고 통제되는 사회, 마치 블랙 미러가 그렸던 암울한 미래는 이미 중국과, 다른 전제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동의 수많은 혁명가가 정부의 검열에 걸려 감옥에 갇히고, 중국은 인터넷을 장악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인도는 카슈미르와 같은 분쟁 지역의 인터넷을 차단한다. 이는 기술과 독재가 만났을 때의 디스토피아, 조지 오웰이 보지 못했던, 또 다른 1984년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문단처럼 주인공 윈스턴은 1984년의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He loved Big Brother. 우리도 깨어있지 않은 이상, 2020년의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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