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인 것과 가상의 것, 그 사이에서
뉴욕의 28가 역에서 만난 지하철 교통카드 판매기는 평범했다. 구매할 교통카드 종류를 선택한 뒤, 충전 액수를 입력하고 요금을 지불하면 노란색 카드가 나온다. 다만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하나의 지점은, 뉴욕의 판매기에는 터치스크린 아래에 금속으로 된 은색의 키패드가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카드 구매 과정에서 두어 번 숫자를 입력하게 되는데, 이때 스크린 대신 키패드를 사용하면 손가락이 차가운 버튼에 닿는 감각, 그리고 조금의 압력을 가할 때 키가 딸깍, 하고 눌리는 묵직한 타건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고유한 키패드의 존재는 뉴욕에서 교통카드를 구매하는 경험을 분명히 아날로그적인 동시에 확실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터치스크린의 시대에 전화번호를 누르는 일, 메시지를 보내는 일,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모두 같은 매끄러운 평면 위에서 이루어진다. 더 이상 플라스틱 다이얼이나 금속 셔터 버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영역에서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가상의 것’으로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지금, 다시 계몽(Enlightenment Now)』에서 작은 스마트폰 하나가 전화번호부에서 나침반에 이르는 수많은 물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종이와 금속, 플라스틱을 모두 대체하는 탈물질화의 과정을 조명한다. 이 과정의 끝에 자리한 가상의 책이나 카메라, 지갑은 그것들의 물리적 원형들에 비해 월등히 확장적인 사용자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의 정의를 바로 찾아보거나, 촬영한 사진을 몇 초 만에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가상의 환경이 제공하는 무시하기 어려운 혜택이다.
그런데 2차원의 평면이라는 매우 낯설고 추상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상의 무언가가 쉽게 이해되고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물리적 세계, 그리고 그 안의 원형들과 최대한 비슷한 방식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자책의 페이지를 이동할 때 마치 종이 책장을 넘기듯 손가락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쓸어넘기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촬영할 때는 실제 셔터 버튼 같은 흰색 원을 터치한다. 애플 계산기 앱의 디자인은 1970년대 브라운에서 출시한 실물 계산기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의 개발을 가능하게 한 주요 돌파구로 관성이라는 물리적 성질을 모방해 인터페이스에 적용한 것을 꼽았다(스크린에서 손가락을 떼어도 현실에서와 같이 일정 시간 스크롤이 지속되는 효과가 이것이다).
그러니까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가상의 개체들은 그것들이 대신하는 물리적 개체들과의 ‘비유’ 속에서 존재한다. 가상의 영역에 있는 무언가가 기능하는 논리가 현실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의 정의상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결코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비교의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종이책과 전자책, 또는 셔터 버튼과 스크린 속 흰색 원은 유사하지만 분명히 서로 동일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가상의 문법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물리적 세계에만 남겨지는 무언가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뉴욕의 교통카드 판매기를 떠올린다. 터치스크린 속 가상의 키패드는 물리적 키패드를 기능적으로 완전히 모방할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커지고 작아지거나 다른 내용을 표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확장적이다. 그러나 금속 키에 손가락을 갖다댔을 때의 단단한 물성과 차가운 온도, 적당한 압력으로 키를 누를 때의 타건감과 소리는 가상의 무언가에 의해 구현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종이 책장을 넘길 때의 미세한 소리와 종이 자체의 질감, 또는 셔터 버튼이 주는 무게감 또한 마찬가지로 전자책이나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경험될 수 없다. 결국 가상의 것이 물리적인 것에 비유될 때 간과되는 것은 미묘한 감각들, 그리고 그것들이 중첩되어 형성하는 고유한 경험인 것이다.
복합적인 감각은 분명 그 자체로 만족감을 제공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감각과 그것이 구성하는 경험 사이의 연관성이다. 교통카드 판매기의 키패드가 지닌 고유한 압력의 감각을 지하철 탑승이라는 경험과 연결지어 생각하듯, 우리는 감각을 통해 경험을 정의하고 기억한다. 따라서 책장을 넘기고 셔터 버튼의 물성을 느끼며 버튼을 누르는 것은—적어도 우리가 인지하기에—책을 읽고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의 경험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구성 요소인 것이다. “전자책을 읽으면 책을 읽는 것 같지가 않다”는 말에는, 책을 읽는다는 경험과 불가결할 정도로 긴밀히 연결된 고유한 감각들의 복합을 전자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그렇기에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 행위는, 아무리 기능적으로는 차이가 없거나 심지어는 종이책보다 나을지라도, 불완전하게 느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확장과 연결이라는 기치 아래 이루어지는 가상으로의 전환 속에서 감각적인 경험들은 빠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최근 우리는 여러 맥락에서 ‘감각의 역습’을 목격하고 있다. 일반적인 멤브레인 키보드나 터치스크린에 내장된 가상 키보드보다 가격대가 높은 기계식 키보드의 유행은 그 특유의 타건감과 소리, 그러니까 타이핑할 때의 감각과 경험에 큰 가치가 부여된 결과이다. 고품질 디지털 음원과 비교해 LP가 가지는 매력 또한 상당 부분이 LP를 직접 턴테이블에 올리고 카트리지를 조심스레 그 위에 놓는, 촉각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사용자 경험에서 기인한다. 2014년, 이케아는 신제품 카탈로그를 종이책 형태로 발표했는데, 이 책의 이름을 ‘북북(bookbook)’—맥북이나 크롬북과 같은 전자 기기의 작명법을 패러디한 것이다—으로 소개하고 ‘페이지를 이동할 때는 손가락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쓸어넘기라’거나 마음에 드는 컨텐츠를 손에서 손으로 직접 ‘공유’하라고 하는 등, 이미 한 번 가상의 문법으로 번역된 사용자 경험을 다시금 물리적 세계로 되찾아오는 기획을 선보였다. 때로는 기능적 또는 경제적 비용도 감수하며 물리적인 것이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향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게 된 것이다.
감각에 집중하는 것은 확장적이되 불완전한 사용자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복합적 디자인의 경험적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탐색할 기회를 제공한다.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 켄야(Kenya Hara)는 그러한 보다 포괄적인 디자인의 과정을 ‘정보의 건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감각적인 자극들, 그리고 그것들이 소환하는 기억들이 분절적으로 수용되지 않고—마치 건물의 구성 요소들처럼—서로 상호작용하며 쌓아올려질 때 가장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켄야는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개폐회식 프로그램을 디자인하면서, 푹신한 질감을 가진 흰색 종이에 글자를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눈을 밟던 기억을 되살리는” 표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식으로 눈의 형태와 느낌뿐 아니라 눈을 밟던 순간의 희미한 기억과 감정까지 불러오는 기획은 종이의 무게감과 질감, 또는 찍혀나온 글자들의 촉감 같은 미묘한 감각들이 중첩되어 작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감각을 자극하는 디자인은 사용자 경험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깊고 다층적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철근만 가지고는 영혼에 소구하는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매끄러운 스크린 위로 보이는 것, 그것이 제공하는 확장성에만 집중할 때 ‘정보의 건축’으로서의 디자인은 그 위력을 잃는다. 복합적인 감각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디자인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고 다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오히려 넓어지는 듯하다.
결국 감각의 역습은 물리적인 것, 공감각적인 것을 재발견함으로써 확장적인 경험과 복합적인 경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하고 그 사이에서 점유할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보이지만, 사실 확장성과 복합성이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일한 기획 안에서 두 지점을 균형 있게 오가거나 심지어는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디자인의 효용은 보다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Pinker, S. (2018). Enlightenment Now: The Case for Reason, Science, Humanism, and Progress (pp. 121-155). New York, Penguin Books.
Hara, K. (2007).
디자인의 디자인 (민병걸 역, pp. 71-113). 파주,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