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디자인에 대한 소고
우리는 옆집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알지 못하며, 집 앞 가게 주인의 개인적 삶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웃과 남는 음식을 나눠 먹거나 필요한 물건을 서로 빌리는 것과 같은 문화는 이제 매우 드물게 경험되고, 우리의 관계맺음은 가족과 직장(또는 학교)에 점점 더 의존한다. ‘동네’라는 지리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지역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다. 공동체의 공백 속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는 모두와 항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을지 몰라도, 정작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는 철저히 단절되게 되었다.
이렇듯 지역 기반 공동체의 부재로 파편화된 삶들을 다시금 이어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직장이나 학교의 생산적인 목표들로부터 독립된 사회적 네트워크의 존재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느슨하게 의지할 구석을 제공하고, 다른 배경이나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게 하며, 생각이 다른 이들이 보다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Ray Oldenburg)는 책 『제 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에서 이러한 사회적 네트워크와 이를 지탱하는 공공 공간의 부재가 도시에서 경험되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다양성을 제한하고,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운 외로운 환경을 만든다고 보았다.
이 시대적 과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의 하나는 소규모 지역 공동체를 지원하는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공원과 놀이터, 양로원과 같은 공공 장소는 사람들이 모이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에 더해 이러한 장소들의 접근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적 개입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절한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 놓기만 하면 기역 기반 공동체의 ‘가능성’이—가능성으로 남지 않고—실현될 것이라는 가정은 경우에 따라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공원을 자주 이용하지만, 그곳에서 일회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거나 지속적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드물다. 결국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들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올덴버그가 ‘제 3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안락한 스케일과 개방성, 대화 지향성, 쾌활한 분위기 등을 갖춘 비공식적 공공 장소들—작은 카페나 술집이 될 수도, 동네 서점 또는 미용실이 될 수도 있다—은 지속적인 지역 기반 공동체 형성에 보다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그런 유기적인 장소는 ‘건설’되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도 어렵기 때문에 도시 환경 조성을 중심으로 하는 해결 방법의 일부로 볼 수 없다.
공공 공간을 짓는 것이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전통적이고 하드웨어적인 접근이라면, 야마자키 료(Yamazaki Ryo)의 ‘커뮤니티 디자인’ 개념은 같은 목표를 향한 소프트웨어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크게 두 가지 층위에서 정의될 수 있는데, 과정의 측면에서는 지역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디자인 프로세스를 이끌어가는 것이고, 결과의 측면에서는 이 참여적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디자이너의 개입이 종료되고 나서도 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지속하는 일을 디자인의 수단이자 목표로 삼는 것인데, 야마자키는 이 개념을 통해 낙도 주민들과 함께 지역의 매력을 발견하고 홍보 책자를 만들거나, 어린이들이 지속적으로 바꾸고 만들어가면서 서로 친해질 수 있는 놀이터를 설계하는 등의 활동을 진행해 왔다. 물론 이같은 접근은 그 끝에 어떠한 물리적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공원이나 놀이터와 같은 물리적 구조물이 포함되더라도, 그 형태나 미학보다 완성된 구조물을 어떻게 장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운영할 것인지에 고민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디자인은 분명 소프트웨어 중심적 개념이다.
야마자키의 책 『커뮤니티 디자인』을 보면, 커뮤니티 디자인 과정의 핵심 요소인 지역 공동체의 디자인 프로세스 참여는 ‘워크샵’의 형태로 주로 실현된다. 야마자키는 일본의 낙도인 시마네현 아마정의 종합진흥계획(2007)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배경의 지역 주민을 인터뷰하고 그들과 워크샵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사람’, ‘환경’, ‘생활’, ‘산업’이라는, 계획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주제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 중 각각의 주제에 관심을 가진 주민들을 모아 보다 소규모의 워크샵을 가지면서 각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 사항을 도출하고, 지자체와의 협의를 거쳐 계획에 최종적으로 반영했다. 외부인인 야마자키의 관점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관점을 계획에 반영하되, 야마자키는 주민의 정리되지 않은 관심사와 생각들을 워크샵을 통해 구체적 솔루션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논의를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워크샵 활동은 주로 자유로운 토론이나 브레인스토밍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리마후지 공원 놀이터(2001-2004) 설계 과정에서는 놀이터를 실제로 사용할 아이들의 어휘력을 감안, 아이들에게 원하는 놀이터를 만들어보라고 하거나 야외에서 자유롭게 놀아보도록 한 후 그 과정을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워크샵을 통한 지역 주민의 참여 유도라는 방법론은 1960-70년대 이탈리아 건축가 지안카를로 데 카를로(Giancarlo de Carlo)가 시도한 ‘참여의 건축’ 개념과 닮아 있다. 모더니즘 건축의 추상성을 거부한 그는 이른바 ‘전지적 건축가’에 의해 일반화된 가상의 사용자가 아닌, 실제로 건물에서 생활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을 제안했는데, 이를 위해 건축가 또는 도시계획가의 역할이 설계 과정에 걸쳐 전권을 행사하는 것에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권장하고 이들의 참여 과정을 조율하면서 시민 계층이 토지 활용 방식과 건축 형태를 선택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야마자키가 효과적인 커뮤니티 디자인을 위해 설정하는 디자이너의 중재자적 역할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야마자키처럼, 데 카를로 또한 테르니 마테오티 주택단지(1969-1975)와 리미니 도시계획(1970-1972) 등의 설계 과정에서 반복적인 워크샵과 토론회를 통해 지역 주민의 의견과 참여를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다. “시가지를 구성하는 다양한 하부 구조들을 다양한 범주와 계층의 시민이 어떤 식으로 활용해 왔는가”와 같은, 건축가 혼자서는 온전히 답하기 힘든 질문들에 대한 의견 교환을 통해 공동체의 수요를 파악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같은 방법론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한계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커뮤니티 디자인은 (참여의 건축이 그렇듯) 디자이너의 전인적 역량에 지나치게 의존적일 수 있어 보인다. 디자인 프로세스에 익숙하지 않고, 때로는 프로젝트에 열의가 없거나 비협조적일지도 모르는 지역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건설적인 논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결과물로 바꿔내는 작업은 전통적인 디자이너의 역할에 더해—순발력이나 서글서글함, 감정에 호소하는 능력 같은—넓은 범위의 대인 기술 또한 요구한다. 야마자키가 대학생으로 구성된 팀과 진행한 요노강 댐 프로젝트(2007-2009)에서 팀 멤버들이 “무서운 사람이 나타날 경우 누가 울음을 터뜨릴 것인지”와 같은 세세한 상황 대응까지도 준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가 주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주요 의사결정을 독자적으로 시도할 경우, 디자이너와 주민 사이의 신뢰 관계가 영향을 받아 프로젝트가 크게 흔들리거나 지역 공동체를 충분히 활성화하지 못하는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또 하나의 한계점은 지역 주민의 참여와 공동체의 자립이 지속되지 못하고 표면적이거나 일시적인 수준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이다. 1971년, 데 카를로는 강연에서 테르니 마테오티 주택단지의 “거주자들이 전문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기술적인 이유로 건설 현장의 예산 관리에서 제외되는 순간부터” 주민 참여를 이어나갈 동력이 떨어졌다고 회고했다(결국 마테오티 단지는 일부만 실현된 채 중단되었다). 비전문가인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프로젝트의 주요 의사 결정자로서 참여시키고, 나아가 외부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커뮤니티 디자인을 통해 제주도 옆 작은 섬의 자연적, 문화적 특색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섬의 공동체와 경제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활성화하고자 한 가파도 프로젝트(2013-2018) 역시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빈집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와 방치된 구조물을 활용한 상주 작가 생활 공간 등을 선보여 관광과 문화를 유치한 이 프로젝트는 야마자키의 방법론을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레스토랑과 스낵 바 등 다양한 사업을 주민 협동조합 주도로 지속해 운영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과 달리, 주민들 사이의 갈등과 법적 논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다. 마테오티 단지와 가파도 프로젝트의 사례는 우리로 하여금 주민들의 진정하고 지속가능한 참여,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궁극적 자립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디자인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보편적이기보다는 지역적이고, 일회적이기보다는 지속가능한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최근의 흐름에 힘입어 확산하고 있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프로젝트의 주도권이 지역 공동체로 성공적으로 넘어가지 못한 경우로 볼 수 있지만, 야마자키는 커뮤니티 디자인 과정의 속도를 충분히 느리게 가져갈 경우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주민 스스로가 프로젝트를 견고히 하고 그 과정에서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소개하는 이에시마 마을 만들기(2002)나 호즈미 제재소 프로젝트(2007) 등에서는 디자이너의 개입이 끝날 때까지 수년이 소요되었는데, 지역의 특색에 대한 집중과 함께 지역 공동체와의 느리더라도 지속적인 밀착이 있을 때 커뮤니티 디자인이 가지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듯하다.
결국 커뮤니티 디자인은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가 아니라, 지역적인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번안될 수 있는 일종의 ‘기조’로서 효용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로젝트가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의 적극적 참여라는 핵심 수단에 기반하기만 한다면, 결과물의 형식이나 구체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커뮤니티 디자인을 넓고 추상적인 기조로서 정의한다면, 그것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중재자 또는 촉진자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외부인에 의하지 않고 지역 공동체 내부에서 수행되는 것일 것이다. 지역의 사회적 네트워크에 소속된 개인들이 (단순히 참여하는 것을 넘어) 열의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주도할 때 공동체와의 소통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장기적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자립 또한 한층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