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제임스 폴식은 건축이 “치유로서의 예술”이라고 했다. 멋진 말이지만, 처음 들었을 때 아 그렇지,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들보다 건축에 관심이 많지만, 그런 나조차 과장법을 꽤나 보탠 슬로건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건축을 보다가 치유를 받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또 다른 건축가 최문규(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와 인사동 쌈지길의 설계자이다)가 대답했듯, “치유까지는 없겠죠,”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건축가라는 직업을 다룬 책을 읽었다. 국적도 세대도 배경도 다른 건축가들과 각각 진행한 인터뷰들을 모아 놓았다(최문규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누군가는 모든 것을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집중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건축주를 바라보는 눈길도, 사회를 대하는 태도도 제각각이었다. 강하게 드러나는 각자의 철학들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면으로나마 만난 건축가들은 그러나 꼭 하나, ‘사람’을 한사코 말한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중랑구의 나은중은 건축이 “사람을 바탕으로 장소를 만드는 행위”라고 했고, 킹스 크로스 역 근처의 존 포슨은 건축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며 살아가는지가 중요하고 또 흥미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최문규에게 있어 “건축가가 다루는 모든 것은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모든 건축가에게 “깔려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주거를 제공하고, 업무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다. 건축은 마치 옷과 같아서,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행동을, 언어를,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대리석 바닥과 높은 기둥들로 지어진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같은 건물은 맞춤으로 만들어진 턱시도 같다. 누구나 그곳에 들어가면 격식을 차리게 되고, 마치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따뜻한 붉은 벽돌과 열린 공간들로 채워진 옛 샘터 사옥 같은 건물은 어딘가 유니클로 티셔츠 같다. 편안하고, 친밀하다.
그래서인지 핀란드 건축가 에로 사리넨은 1954년 어윈 유니온 뱅크 건물을 설계하면서 주출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 건물의 출입구가 사람보다 높이 있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건물의 권위를 느끼게 하고, 따라서 보도와 높이 위치한 출입구를 이어 주는 계단은 그러한 권위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다. 권위적인 중앙 계단이라는 당시 은행 건축의 문법을 배제한 결정은 혁신적인 것이었고, 그 하나의 결정이 은행과 고객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인 것에서 수평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다. 고객들로 하여금 은행에 가는 일을 보다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구태여 반세기를 거슬러 갈 필요도 없다. 나은중이 소속된 ‘네임리스 건축’은 2015년 남양주에 지어진 ‘삼각학교’의 설계를 맡았다. 역시나 효율성을 중시하는 통상적 학교 건축에서 탈피한, “다수에 의해 다수가 열려 있는 평등한 공간”이었다. 그는 완공 후 학교를 방문한 어느 날, 건물의 2층과 3층 사이의 틈으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학생들을 목격했다고 회상한다. 그 학생들은 복도가 길게 늘어선 보통 학교에서라면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으로부터 전달되는 공간의 규칙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건축가의 역할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돕고, 그들의 일상에 잔재하는 위계를 허물고, 그들이 주변 환경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자 사명이다. 이 지점이 건축의 — 또 건축가의 — 본질이자 치유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또 최문규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큰 의미로 ‘건축을 잘한다’는 말은 의사처럼 최선을 다해 날 찾아온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겁니다.
건축이 치유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폴식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그도 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