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 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 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도시의 침묵 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매가 살고 있는 곳
익숙한 노랫말이죠. ‘제주도의 푸른 밤’이란 곡의 가사를 옮겨 적어봤습니다. 여느 영상에서 제주도의 풍경이 등장할 때마다 들려오는, 오랫동안 사랑받는 곡이죠. 리메이크 된 적이 많아서 누군가는 성시경의 목소리로 누군가는 태연의 목소리로 들어보셨을 텐데요. 원곡은 뮤지션 최성원의 1집 앨범 수록곡으로 1988년 8월, 여름에 발매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제주로 향하는 바다에서, 제주에 잠시 머무르던 지인의 집에서 느꼈던 감정을 담아 곡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이 뮤지션은 당시 제주의 '로컬 크리에이터'였던 셈이죠.
*로컬 크리에이터 : 지역 시장에서 지역 자원, 문화, 커뮤니티를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 소상공인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아파트 담벼락보다 바다 풍경이 보이는 창이 좋다거나 자극적인 미디어나 팍팍한 돈벌이에 지쳤다거나 카페나 술집,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도시의 침묵이 느껴진다는 그래서 바다의 속삭임을 찾아 떠나자는 화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요. 3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같은 마음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더 나아가 지역에 자리 잡고 삶을 꾸려 나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도 트렌드 키워드를 통해 이를 ‘러스틱 라이프’ 현상이라고 주목한 바 있는데요. 팬데믹의 영향으로 재택근무와 원격학습의 기회가 대폭 늘면서 ‘굳이 비싸고 복잡한 도심에 살아야 할까?’ 같은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 사람들이 나를 위한 힐링 공간을 찾아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지역에서 창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삼시세끼’ 시리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전원생활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여겨지고 있죠.
‘러스틱 라이프’로 표현되는 라이프 스타일은 모든 것이 속도와 경제적 효율에 좌우되는 도시의 일상을 덜어내고 소박하고 여유 있는 ‘촌’스러움을 삶에 더하는 새로운 지향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렇듯 주류에 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삶의 자세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방식을 개척하려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MZ세대가 추구하는 가치소비의 태도와 맞아 떨어져 전 지역의 곳곳에 다채로운 로컬* 지향 브랜드, 로컬 지향 크리에이터들에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이란 ‘서울 말고 다 시골’이라는 의미보다는 ‘사람들의 삶 터’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안에도 다양한 로컬이 있습니다. ‘힙지로’로 불리는 을지로 세운상가 주변, 이태원, 연트럴 파크 등이 서울의 로컬이라 할 만한 곳들이죠.
MZ세대가 주목하는 로컬 지향 라이프 스타일
한동안 서점에 가면 가판대에 ‘퇴사’나 '휴직'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 빼곡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로컬'이 그 옆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요. 이전에 로컬은 흔히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입을 통해 중앙집권이 아닌 지역의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 라는 주제의 맥락에서 다뤄져 왔습니다. ‘로컬 컬처’라는 게 있긴 했지만 이는 소수가 누리는 변방의 문화를 의미했죠. 그러나 로컬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어느새 새롭게 주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대량 생산, 대량 유통, 대량 소비로 이어지는 성장 시대의 경제 패러다임에서는 내가 먹는 것, 내가 입는 것, 내가 소비하는 것들이 어디서 누가 만드는지 알지 못했죠.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게 어느 농장에서 나온 건지’ 혹은 ‘누가 재배한 건지’ 이런 가치에 대해 훨씬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됐어요.
한종호 |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SBS 다큐 ‘나는 지역에서 살기로 했다’ 1부 중에서
로컬 지향 트렌드의 주역은 역시 밀레니얼과 그 이후 세대입니다. MZ세대는 산업화를 겪은 부모세대와 달리 자기 방식대로 삶을 꾸려 가려는 자기 주도성이 강한 세대로 대표됩니다. 이전 세대가 집중했던 고도성장과 최대효율, 무한경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하며 스스로가 소비하는 물건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출처와 과정을 알고 신뢰성을 확인하고자 하며 가치와 신념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기 위해 시간을 들입니다. 믿을 만한 선택지가 없다면 직접 만들어 가려는 적극성도 보입니다. 소비를 윤리적 가치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지요.
일례로 홍대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가 생계가 어려운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을 내어준 이야기가 소개된 뒤 이 가게에 주문폭주 및 후원으로 영업중단 사태까지 벌어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돈쭐을 내주다'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는데요. 이러한 현상은 MZ세대의 소비방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반대 사례로는 대리점에 갑질을 하고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은 남양유업에 불매운동을 벌인 일이나 재활용하기 어려운 화장품 용기를 만든 회사에 찾아가 빈 용기들을 쌓아놓고 껍데기 말고 알맹이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일이 있습니다.
SNS를 통해 확산되고 확장되는 MZ세대의 소비파워는 기업들이 ‘ESG’에 무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앞다투어 기업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ESG*에 맞춰 새롭게 브랜딩하고 있죠.
*ESG : 기업의 ‘환경(Environment)과 사회(Social)에 대한 책임, 의사결정(Governance)구조의 투명성을 평가하는 핵심요소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패러다임이다
MZ세대 소비자들의 가치소비의 기준에 맞는 작지만 개성있고 지속가능함을 추구하는 주체들이 속속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올바른 행동과 가치관을 지닌 기업에 소비하겠다는 기준과 가치표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불편함도 자처하는 태도는 그간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지형을 쌓고 넓혀 왔던 로컬 지향 브랜드, 로컬 지향 라이프 스타일과 닿아 공명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성과 로컬 지향 브랜드
로컬을 지향한다는 건 기업을 어떻게 운영하고 싶은 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외주에 맡기면 지역 밖, 나라 밖에서 우리의 경제가 형성되죠. 우리는 운영을 위해 지출하는 소비의 90%가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어요. 수익성을 사업의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다른 방식을 취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공동체를 기반으로 삼거나 지역의 기업과 생산자들을 도울 수 없겠죠. 돈은 적게 벌지만, 하고 싶은 일을 같이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알렉스 개넘 | 업라이트 브루어리 대표
SBS 다큐 ‘나는 지역에서 살기로 했다’ 2부 중에서
느리게 사는 삶, 여유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각광 받는 도시, 킨포크로 유명한 포틀랜드에는 ‘업라이트 브루어리’라는 양조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기계의 힘이 아닌 사람 손으로 만든 수제맥주를 선보이고 싶어 규모를 늘리지 않고 딱 10개 배럴 만큼만 생산한다고 하는데요. 맥주의 주재료가 되는 몰트를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접한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연구를 통해 곡물의 개량품종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맥주를 내놓기도 하고요. 탭 핸들도 꼭 지역 내에서 목공 일을 하는 생산자에게 의뢰한다고 해요. 비치되어 있는 모든 가구도 지역 내 목공장인에게 받아온 것들입니다. 병 라벨에 들어가는 작품에도 ‘연결’과 ‘공유’의 정신을 담았으며 지역 내 디자인업체에 의뢰해서 제작하고 인쇄한다고 합니다. 작품들에 대한 인기도 좋아서 테이스팅 룸에 전시해놓고 판매하기도 한다고 해요. 포틀랜드의 각별한 자부심이 묻어 있는 브루어리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 내 사업자들과 길드를 형성해 끈끈한 연대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리건의 소비자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소비자들도 수제맥주의 맛이 가끔씩 생각나 찾아온다고 하니 소비자의 신뢰를 톡톡히 얻고 있죠.
제주올레 코스를 면하고 있는 제주 무릉리에는 ‘무릉외갓집’이라는 마을 기업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매달 제철 농산물로 구성한 꾸러미를 회원들에게 배송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해요. 꾸러미를 구성하는 농산물은 인접한 마을의 농부 45명이 생산자로 참여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생산자인 농부 외에 프로그래머, 사진가, 마케터, 공익 활동가, 연극인 등 다양한 직원들이 함께 하고 있는데요. 마을 주민들이 직접 논의하며 농산물의 안정적 판매와 소득이 보장되는 지속가능한 운영을 고민한 결과, 갖춰진 구조라고 해요. 직거래를 통해 소비자에게 믿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보내기 위함이죠. 브랜드의 본질이 ‘농산물’과 ‘지역’이라 생각하고 BI부터 공간, 패키지, 홈페이지까지 모두 농산물이 돋보이는 자연을 닮은 브랜드로 디자인했다고 하는데요. 현재 무릉외갓집의 회원은 3천여 명으로 매달 농산물 꾸러미를 받아보는 사람이 350명, 격월로 과일을 받아보는 회원이 70명이며 인근 도시에서도 매주 80여 명이 꾸러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지역 내 생산자들의 연대와 지역 커뮤니티의 힘, 그리고 ‘지역다움’을 토대로 한 아이디어가 소비자의 가치소비와 호응한 셈입니다.
위와 같이 탄소배출량과 폐기물, 푸드 마일리지*를 줄이기 위한 로컬푸드를 소비하고 국내 지역에서 수급한 원료를 활용하여 수송과 유통 과정에서도 탄소발자국이 덜 발생하는 로컬원료를 활용한 브루어리 혹은 화장품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로컬 지향의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국내에도 지역 내에서 생산된 곡물로 맥주를 만들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나 지역명소의 이름을 붙여 식음료를 판매하는 로컬 브루어리나 지역의 대표적인 컨텐츠와 스토리를 발굴하여 잡지를 발간하는 로컬 매거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푸드 마일리지 : 생산지에서 소비자의 식탁까지 도달하는 거리로, 운송 및 유통 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개념으로써 쓰인다
로컬은 ‘지역다움’을 기반으로 지역 내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합니다.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요. 규모보다는 품질을, 편리함보다는 환경을, 수익성보다는 지역 이웃들과의 관계와 상생을 우위에 두겠다는 지역에 대한 애정을 기초에 둔 가치관이 녹아있죠. 지역의 정체성을 존중하며 공동체 안에서 이웃에 의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들어진 재화를 활용하려는 창작자와 지역 내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유대감을 얻으며 지속가능한 가치도 지키고자 하는 소비자의 가치소비가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착한 제품을 만들고 착한 방식으로 유통한 쪽을 소비하겠다고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윤리적인 소비의 움직임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코로나가 그 움직임의 속도를 높이는 데 역할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비 흐름과 가치관의 기저에는 지구에 사는 모두가 상생하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의 소비는 어떤 분야에서든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문화가, 더불어 로컬을 지향하는 소비문화가 더욱 중시될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로컬이 중시된다는 의미는 지역 내에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탄소발자국과 푸드 마일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앞으로 어떤 로컬 브랜드가 지역성을 살려 개성 넘치는 문화를 이룰지, 어떤 로컬 지향 라이프스타일이 다양한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유행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로컬을 지향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이야기를 연재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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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릉외갓집 홈페이지
참고 자료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2
[다큐] SBS 다큐 ‘나는 지역에서 살기로 했다’
[기사] 더나은미래. 도대체 로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기사] 비로컬. 밀레니얼의 특성⓷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는 '진정성'이라 여기는 세대
[기사] 디자인하우스. 브랜드로 도시를 여행하는 법. 스몰 로컬 브랜드.
[기사] 디자인하우스. 마을을 성장시킨 농산물 꾸러미 무릉외갓집.
[사이트] 무릉외갓집 홈페이지 브랜드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