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Part.1
과학은 조선시대에 과거를 위한 학문을 줄여서 과학이라 불렀으며, 당시에는 Science의 뜻이 아니라 "전문화된 각 분야의 학문" 정도로 쓰이고 있었다. 이후 일부에서 Science의 뜻에 맞는 이름인 "격물학"으로 정정하기를 원했으나 다수의 선택으로 현제까지 "과학"이라고 쓰이고 있다. 보통 과학이라고 하면 하얀 가운을 입고 알 수 없는 수식과 문자로 가득 찬 칠판을 바라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해답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로 특출난 일부 이과생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영화 '세 얼간이'에서 Machine(기계)에 대해 교수님이 정의해 보라고 한다. 이때 주인공 란초는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 "노력과 시간을 덜어주는 기계", "선풍기, 전화기, 계산기, 펜촉, 바지 지퍼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기계이다."라고 Machine에 대해 정의한다. 하지만 질문을 한 교수님은 못마땅한 듯이 그래서 정의가 뭐냐고 재차 물어보게 되고 그럴듯한 전문용어로 구성된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외우고 이야기하는 다른 친구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학도 기계와 다르지 않다. 일례로 매년 여름이면 우리나라는 태풍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태풍이 한반도를 근접할 때마다 여러 대중매체에서 태풍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안내를 하곤 하는데 그중 "태풍에 대비해 베란다 유리창에 신문지를 붙이면 유리가 깨지지 않는다"라고 안내를 한다. 우리는 보통 "아 그렇구나"하고 세뇌를 받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신문지를 붙이기에만 급급할 뿐 "why?, 왜?"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듯하다. 또한 요즘 대부분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문에 대해서도 어떤 원리로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되는지?(물론 근접센서를 통해서 인식을 한다고는 알고 있지만 해당 센서가 어떤 원리로 인식을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기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깊숙이 녹아 있으며 우리의 삶에 질을 높여주고 노력과 시간을 덜어주는 도우미 같은 역할을 한다. 과학의 본질은 과학적 사고에 있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단편적 지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를 뜻하며 특정한 기술보다는 사고하는 방법,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휠씬 더 중요하다.
물리학이란 물질의 성질과 구조, 현상과 그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으로 가장 기초적인 과학의 큰 분야이며 우주 또는 자연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물체의 운동 원리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물리학은 인간을 이루고 있는 작은 입자부터 우주까지 과학의 전반적인 모든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학창시절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았던 시기에 그동안 손놓고 포기하고 있던 물리 부분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한 달 이상 물리만 공부한 적이 있다. 이후 바닥을 치던 물리 부분의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간 것을 확인하며 "나는 물리를 마스터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실상은 물리 교과서에서 나오는 수학 공식을 암기해서 시험 문제를 해결한 것일 뿐 기초적인 개념 & 지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 그저 시험만 잘 보는 기계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기초 학문인 물리학, 나아가 과학이 현대의 사람들에게 특정인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비단 대중매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저자 최무영 교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나라 교육은 애초에 이과 문과로 나뉘며 대부분의 남자는 이과, 여자는 문과라는 구분을 지어 놓고 문과생은 과학 별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암묵적인 잣대를 지어 과학은 몰라도 되는 학문으로 배척해 버린다. 하지만 문학, 연극학 등이야말로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단순히 문학이 글을 쓰거나 연극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의하고 개념화하여 교육에 이르는 과정 모두가 과학이며 저술+과학이 문학인 것 처럼 학문이란 단어가 붙으면 모두 과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이과생은 어떠할까? 서울대 학생 99%에게 왜 물리가 어렵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너무 수학적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원리를 이해하기 보다 과학지식 하나하나 배우고는 외우도록 교육받기 때문에 조금만 응용하거나 다른 보기를 들면 새로운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특정 지식을 단편적으로 배우는 데에서 그치고 보편 지식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고 재미도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 과학을 공부하는지? 과학 교육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봐도 보편 지식을 이해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무엇보다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겠다.
수많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물질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인하여 구성원 하나하나와는 관계없이 전체의 집단 성질이 생겨나는 현상을 '떠오름(emergence)'이라 부릅니다. 한자어로는 창발(創發)이라고 하지요.(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이야기 163P)
구성원 전체, 흔히 '계'라 지칭하는 대상에 집단 성질이 생긴다. 여러 구성원들이 서로 협동해서 생겨난다는 뜻해서 협동현상이라 부르며, 구성원 하나하나와는 관계없는 집단 성질이 생겨나므로 이를 '떠오름' 또는 창발이라고 이야기한다. 이헌 협동현상의 가장 궁극적인 떠오름은 뭘까? 저자는 생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를 보면 주인공이 죽은 엄마를 되살리기 위해 금기되어 있는 인체 연성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인체 연성에 필요한 재료는 평균 성인 1명을 기준으로 물 35리터, 탄소 20킬로그램, 암모니아 4리터, 석회 1.5킬로그램, 인 800그램, 염분 250그램, 질산칼륨 100그램, 유황 80그램, 불소 7.5그램, 철 5그램, 규소 3그램, 기타 미량 원소 15가지로 어디서든 마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자신들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혈액을 조금 섞으므로써 엄마를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필자는 바로 "생명"이라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생명이 없는 물질을 이용하여 인체를 구성하려 했다는 시도 부터가 잘못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주인공 엘릭의 경우 인체라는 전체를 하나하나 쪼개서 각각의 부분을 이해하면 인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분자들이 많이 모여 세포라는 집단을 만들고 그들의 협동현상을 통해서 생명현상을 창발하게 되는데 이런 창발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분자(물질)의 결합만을 추구하여 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앞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환원론(환원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며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단순한 환원이 인식의 측면에서는 성립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전까지 생명현상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21세기 '복잡계'라는 주제가 나타나면서 물리학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복잡계에 대한 이야기는 2부에서 다뤄볼 예정이다.)
공을 던질 때 처음 조건이 거의 같으면 결과도 거의 같다. 하지만 주사위 던지기는 처음 조건이 살짝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이처럼 처음 조건에 민감한 경우가 혼돈 현상에 해당한다.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이야기 204P)
창발과 함께 최무영 교수의 책 물리학 강의에서 관심 있게 읽은 또 다른 내용은 바로 혼돈과 질서이다. 보통 질서와 혼돈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지며 질서는 '선' 혼돈은 '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혼돈은 아무런 규칙 없이 마구잡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기술하는 뉴턴의 움직임 방정식을 통해 얻어진다. 따라서 혼돈은 완전한 무질서와 달리 그 안에 질서가 숨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혼돈과 질서를 동전의 앞뒤로 비유하며 변증법적이라고 이야기하다 보니 질서와 혼돈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삶 속에 질서와 혼돈은 어떤 것이 있을까? 202년 개봉된 '긴급조치 19호'라는 영화를 보면 외국에서 계속 마돈나 등 유명 가수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이 벌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대통령이 '긴급조치 19호'를 발령, 가수들을 '노래 금지법'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이에 가수들과 팬들이 정부에 대항해 투쟁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정부가 국민을 강압으로 노래를 금지함으로써 질서 있는 삶을 강요하지만 경직된 사회는 변화가 오면 적응하지 못해 무너지는 것처럼 결국 법령은 무산되고 시민들은 다시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찾게 된다. 정부의 권력을 통한 질서는 결국 시민의 투쟁이라는 혼돈을 양상 시키고 시민의 투쟁이라는 혼돈 속에서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보면 질서와 혼돈은 이중성이 있고 어떻게 보면 서로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혼돈이론은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나 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1970년대부터 카오스 이론을 세탁기에 도입하여 물의 불규칙한 흐름에 카오스이론을 적용, 컴퓨터와 연결된 카오스 시뮬레이터를 통해 흐름의 질서를 분석하고 난류 현상을 최소화함으로써 빨랫감의 엉킴을 줄인다는 과학적 사실에 입각해 제품을 출시한 것과 같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실생활에 많은 부분이 이미 적용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씽큐베이션 3기를 시작하기전 그룹장님께서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를 선정 도서로 지정하시고 싶다고 말씀하실 때만 해도 학창시절에 배웠던 F=ma와 같이 수식만 나열된 책을 읽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있었다. 실제 책의 두께나 많은 부분이 수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고 이 책의 서문 격인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이야기'를 먼저 읽어 보면서 왜 이 책을 선정하셨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과학과 관련된 사회문제로 심각한 혼란을 경험해 왔다.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안아키사건', '일본 방사능 폐기물 방출'과 같이 비양심적인 사이비 선동가와 기업가, 나아가 다른 국가들이 힘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사회적 손실은 우리 시민에게 고스란히 피해를 입히게 되어 시민의 안정과 삶을 위협하게 될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은 사회에서 개인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과학적 소양과 사고를 가지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