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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제이 May 01. 2020

뚜벅뚜벅, 길에서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들

길 위에서는 누구나 여행자가 된다. 어떤 방식이라도 좋다. 버스를 타든, 자가용을 이용하든, 그냥 뚜벅뚜벅 걷든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것이 옳다는 정답은 없다. 보편적으로 길 위의 선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목적지로 이동할 때 효율적이면서도 안락한 방식을 택할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금이니 말이다. 하지만 일부의 여행자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자동차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는 대신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걸어서 여행하는 방식을 택한다. 비효율적이고 불편하기까지 한 아날로그적 방식을 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뚜벅이 여행자라 칭한다.

나 역시 여행자의 신분을 가질 때면 뚜벅이라는 수식어를 자주 택하게 된다. 물론 자발적이기만 한 뚜벅이는 아니다. 백수 시절 할 일 없을 때 면허라도 따자 싶어서 면허증을 따놓긴 했는데 지금 집 어딘가에 숨어있어 못 본 지가 몇 년째다. 정말이지 장롱면허의 표본인 셈이다. 백수 시절 취업하면 분명 운전면허가 필요할 거라고들 했지만 막상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굳이 차를 몰지 않아도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출퇴근이 가능했다. 물론 직장 내에서 출장이나 상사를 모시고 외부로 나갈 때는 상사에게 차를 얻어 타면서 약간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친구들이 하나둘씩 차 오너가 되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홀로 외로이 차량 무소유자로 남아있었다. 운전을 제대로 배우면 좋겠지만 길치 방향치인 내가 베스트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드라이버라도 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새로 연수받아 운전을 배우자니 내키지도 않았고 그럴만한 필요성조차 크게 느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혼자 여행을 할 때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뚜벅이 여행자가 된다. 뚜벅이 여행을 하는 데에는 단순히 운전을 못한다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뚜벅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함을 뜻한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광역시를 제외하고는 지하철이 없다. 정시 출발하는 지하철의 편리함은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안녕이다. 부산 같은 번화한 지방이라면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만 어지간한 지방 도시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적어도 서울에 비교하자면 지방도시들의 대중교통은 토끼와 거북이에 비교해도 무리가 아니다. 버스 어플을 켜봐도 도착시간이 '정보 없음'으로 뜨거나 운 좋아도 20분은 우습게 넘긴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못 할 배차간격이지만 지방에서는 그게 일상적이다. 서울에서는 버스 어플 보고 도착시간이 십 분으로만 떠도 한참 기다려야 하네 싶은데 지방에서는 십 분이면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뛰쳐나와서 기다릴법한 감사한 시간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도착시간 '정보 없음'으로 뜨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서 옆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이놈의 버스는 언제 오냐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냥 포기하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반짝 드는 기분이었다. 여행지에서 미리 계획했던 스케줄대로 움직이려면 중간에 지체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가령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대기하는 시간같이 중간에서 붕 뜨는 시간들이 이에 속한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루 안에 가고 싶었던 목적지들을 갈 수가 있는데 붕 뜨는 시간들 때문에 차질이 생기면 다 둘러보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생기고 스멀스멀 짜증까지 올라온다. 그런데 옆 사람은 포기하고 기다리다 보면 온다는 대답을 해준 것이다.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획했던 관광지를 다 둘러보는 미션을 수행하는 것? 그러고 나면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뿌듯함은 남겠지. 하지만 그 뿌듯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에 있지 않을까. 하루 동안의 보고 듣고 느꼈던 과정들의 총체가 바로 여행이니까.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 역시 여행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여유롭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버스는 도착한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조바심을 내는 대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평소 보기 힘들었던 돌담들, 낯선 버스들, 길 한편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여행의 일부였다. 아마 자가용을 타고 관광지로 슝 날아갔다면 마주치지 못했을 평범한 순간들을 조우하게 되는 것이 바로 뚜벅이 여행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낯선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자가용을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걸어서 삼십 분이 걸릴 거리를 저 자동차는 오분이면 도착하겠지. 그런 편리하고 효율적인 여행도 물론 좋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 편리함과 효율성 대신 조금은 힘들고 덜 효율적인 뚜벅이 여행을 택한다. 그저 관광지로 향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길들도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일부가 된다. 낯선 마을로 들어서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나가는 주민들도 구경하고 길바닥에 널어놓은 해초들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한다. 골목 어귀의 집 마당에서 노는 강아지들도 구경하고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길고양이들과도 인사한다. 느리지만 천천히 음미하듯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매일 불어오는 바람도 낯설고 매일 보는 하늘도 새롭다. 관광지가 아니어도 그 길은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가 된다.

낯선 마을을 구경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지는 해와 마주했다. 붉은 어스름이 진 하늘을 바라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노을의 색을 잊고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대게 해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여유 따위와는 거리가 멀기 마련이다. 퇴근을 하고 나면 해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거나 그도 아니면 낮고 높은 건물들에 가려져있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는 유명한 해변이 아닌 평범한 길에서도 어느 순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노을과 마주한다. 버스정류장과 신호등 너머 붉게 지고 있는 해를 두 눈에 담으니 가슴도 붉게 물들어갔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고민들도 서서히 퇴색되어갔다. 길 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어느새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경험은 두 다리로 길 위에 섰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뚜벅이 여행자, 주윗 사람들에게 제발 운전 연수받아서 편하게 여행하라며 잔소리를 듣는 신세이기도 하지만 낯선 여행지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뚜벅이 여행자의 신분을 벗어나기란 좀처럼 힘들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가끔은 운전대를 벗어나 뚜벅뚜벅 느리지만 여행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뚜벅이 여행을 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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