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변론하기 싫다.

by 몬스테라

국선전담변호사 생활 초반에는 내 영혼을 탈탈 털어가는 피고인들에게 체력도 털리고 영혼도 털렸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 경험도 생기고 노하우도 있어서 웬만한 일에는 정상혈압을 유지할 수 있다.


국선전담변호사들은 매달 일정한 숫자의 새로운 사건을 배당받는데, 그 안에는 적절한 비율로 애처로운 사람, 불쌍한 사람,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들이 골고루 있다. 이 중 ‘이상한 사람’ 이 피고인인 사건 건수가 그 달의 사건 운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신건을 받으면 일단 VIP들을 추려낸다.

주로 예민하고 거칠며 비정상적인 요구를 하는 사람, 망상에 빠져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 법에 근거도 없는 증거신청을 요구하는 사람, 사건과 무관한 요구를 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수시로 변호인 교체신청을 하거나 판사 기피신청을 하는 사람, 상대방의 흠을 잡아내어 사사건건 진정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 등이 Very Important Person(VIP)이다.


이 분들은 유형별로 대해야 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데, 빌미를 잡히지 않는 처신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더욱더 의전? 에 신경 써야 한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피고인들의 경우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고, 구속되어 있는 피고인들의 경우 내가 구치소로 접견을 간다. 불구속 피고인인 VIP는 상담 내용을 녹음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적절한 표현이 담기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말한다.


9월에 배당받은 신건 피고인 중 신영국(가명)은 소년 시절부터 보호처분 전력이 화려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징역살이와 잠깐의 출소 기간 그리고 다시 징역살이를 반복했다. 그가 사회에 나와 있는 기간은 다음 징역살이 기간 중 쓸 영치금을 범죄를 통해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나는 항소심(2심) 변호인이었다.


그는 허위 통증을 호소하며 정형외과나 재활병원에 입원한 다음 움직이기 어려운 환자들의 주민등록증과 장애인등록증을 훔쳤다. 그리고 훔친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을 하고 은행에서 피해자 명의로 대출을 받아 유흥비로 사용했다. 이런 일들이 많았는데 그의 피해자들은 주로 장애인이면서 기초생활수급자들이었다.

다 합치니 피해규모가 컸는데 그는 피해자들의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일부는 자신의 돈인 것처럼 숨겼다. 피해회복은 되지 않았으며 피해자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주민등록증과 장애인등록증들을 모두 우연히 병원에서 주웠다고 주장했다.


피고인은 다른 전과도 많았지만 특히 절도죄 전과가 많았다. 절도죄는 같은 전과가 쌓이면 형량이 많이 올라가고 엄히 처벌받기 때문에 피고인은 절도가 아니라 남이 흘린 물건을 주웠다는 ‘점유이탈물횡령죄’로 인정받으려고 꼼수를 쓸 계획이었다.


예전 판결문을 보니 그는 예전 절도사건에서도 CCTV 영상에 포착되지 않은 한, 훔친 물건이 아니라 우연히 주웠다는 주장을 했다. 기록에 조심스럽게 나만 알 수 있는 VIP표시를 해 두었다.


피고인은 나와 접견할 때, 피해자 중 한 사람과 자신을 체포한 경찰을

증인으로 불러서 신문해 달라고 요구했다.


피해자는 주민등록증 등을 도난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도난당한 게 아니라 잃어버리신 거 아닙니까?”라고 묻는다고 한들 피해자가 “아 생각해보니 잃어버린 것 같네요.”라는 대답을 할리 만무하다. 증인신문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증인으로 나와 재판장님 앞에서 피고인에 대한 엄벌호소나 하면 피고인의 형량에 불리하다.


그래서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부르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피고인이 음흉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처럼 법정에 많이 서는 사람들은 법정에서 안 떨리지만 일반인들은 떨거든요. 증인신문 시 잘 쪼면 당황해서 우리가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단전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피해자한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피고인은 “피해금액도 4천만 원 밖에 안 되는데요 그 사람은.”라고 말했다.


“4천만 원이 작은 돈입니까? 기초생활수급자한테 전 재산 같은 돈을 피해 주고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가 주운 게 진실이니까 그렇죠~”라고 말했다. 피고인이 부인하는데 변호인이 자백하라고 검사처럼 하면 됩니까 이래 가면서. 그래서 신청하기로 했다.


그다음, 경찰은 왜 증인신청을 하느냐고 물으니, 피고인은 체포 당시 미란다 원칙을 고지받지 못했다고 했다.

평소 체포의 위법성을 주장한 사건도 있었고 위법한 체포 상태에서 받은 피의자 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여러 번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피고인은 아니다. 분명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을 것이다.


경찰들은 범죄자들에 대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수사하고 체포하는 경찰이라면 각별히 주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도죄 피의자 신문조서를 어떻게든 증거능력이 없게 만들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증인신문 당일

피고인은 나와 검사의 신문이 끝난 이후에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 피해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치면서 “니가 진실을 말해도 나는 처벌받거든? 주민등록증을 흘렸으면 흘렸다고 말을 해!”라고 했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짝다리를 하고 피해자에게 삿대질을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시늉을 하며 소리를 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피해자는 “야 이 사람아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라고 소리치고 재판장님은 도가 지나친 피고인을 제지하고, 다시 피고인은 판사님은 왜 증인 편을 드냐며 난동을 부리고.. 검사님이 증인에게 유리한 신문을 하자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증인은 눈치도 없이 검사님에게 소리 지르고, 교도관은 난동 중인 피고인에게 흥분하지 말라고 제지하고.. 아비규환이었다.


피고인은 재판장님을 향해 법대로 올라갈 듯하며 큰 소리로 따졌다. 재판장님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트집을 잡으며 편파 재판을 주장하고 코로나 때문에 설치한 투명 칸막이를 손으로 치며 “나 이러면 재판 안 받아.”라고 했다.


나는 이런 피고인들을 저지해 본 경험이 있는데, 이런 유형들은 내가 말리면 이것을 빌미로 또 더 큰 쑈에 나아갔다. 어 국선변호인이 내 편을 안 드네?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피고인의 변호인이므로 피고인이 부적절한 처신을 한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도 적절치 않아서 더더욱 가만히 있었다.


마치 피고인은 민란을 일으켜 법정을 장악한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속으로 ‘와.. 진짜 쓰레기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판장님이 나에게 “변호인 최후변론하시지요.”라고 하면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 피고인이 보기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불우하고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사람이고, 한 번만 선처해주시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둥 변론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약 30분간 미동 없이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경추부 염좌가 와서 나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맞은편에서 나를 보는 검사님의 눈빛이 ‘참 먹고살기 힘들다.’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피고인이 난리 끝에 “나 재판 안 받아 씨..”이러면서 유치감으로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갔다.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로 오니

다른 이상한 피고인으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그는 망상이 있는 사기꾼이었는데, 자주 나에게 이상한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보석신청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변호사님, 제가 대선에 출마해야 하니 보석신청을 해주세요.
저에게 4경 8천조가 영치되어 있으니
일부 찾아가서 보석보증금으로 걸면 될 겁니다.



‘아.. 사람이 싫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 백범 김구 -


월급은 위자료의 성격도 가진다.

그런데 월급으로 위자 되지 않는 때가 있다.


우린 모두 소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