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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an 13. 2022

기질

요즘 나는 아들의 사춘기를 앞두고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복기하고 있다. 

아들에게 상처를 덜 주고 싶고, 잘 지내고 싶어서.    


그러다 보니 내 기질이 좀 더 분명하게 느껴지고 나와 아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더 쉬워졌다.


나는 어릴 때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성인이 되면서는 눈치도 생기고 남들 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성도 생겨서 특이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선택의 순간에서는 여전히 내 본래의 기질이 작용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일상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며 신음하는 일도 많았다.

특히 이불 차며 벌떡 일어나기.    



얼마 전

예전 일이 떠올라 나와 친한 사람들에게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는지 물어보았다.


사안은 이렇다.

1996년.
휴대폰이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고 성인들은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
버스요금이 350원이고, 교통카드가 없던 시절.
버스기사님이 매의 눈으로 버스요금을 돈통에 넣는 것을 지켜보던 시절.

나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원거리의 영어학원에 갔다.
학원 갈 때와 올 때 버스비만 동전으로 가지고 갔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길에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다가 50원이 도로 옆 배수구에 빠졌다.
집과 영어학원은 걸어가면 몇 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었다.

요금에서 50원이 모자랐고, 나에게는 공중전화요금도 없었다.
일면식 없는 거리의 사람들이 오가는 속에서 나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지 물으니 나의 친구들은 다 대답이 달랐다.

그러나 그 대답은 평소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답이라서 사실 예상되는 답들이었다.

대답은 아래 여섯 가지 정도 되었다.    


1. 아무리 멀더라도 걸어간다.
2. 기사님께 사정을 해보고, 안 되면 걸어간다.
3. 지나가는 사람에게 빌려본다.
4.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서 기다려 달라고 한 다음 가족을 통해 요금을 지불한다.
5. 마치 350원인 것처럼 300원을 빠른 속도로 돈 통에 팍 넣는다.    
6.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린다.


나는 저 여섯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구걸을 결심했다.    

버스정류장 근처에 큰 공공도서관이 있었는데 그 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은 왠지 야박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측은하게 보고 돈도 잘 줄 것 같았다.


게다가 도서관이니 서로가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은밀하게 구걸할 수 있고 덜 부끄러울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여자 열람실로 들어갔다.


성인 여성 중 법학, 행정학 등의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제외했고, 

간호학과 아동학, 유아교육 관련 책이 책상에 있는 사람으로 구걸 상대를 압축했다. 


그다음에는 대기업 면접 수준으로 관상을 살펴,

가장 관대할 것 같은 사람으로 최종 선발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엄정하게 선발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나는 영어학원 교재 귀퉁이를 찢어서 구구절절 사정을 적고 끝에는

50원만 주세요.

라고 적었다.

50원을 갚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적었다. 50원을 그냥 주십사 한다고.


나는 최종 구걸 상대로 선발된 그녀의 책상 옆에 가서 조용히 쪽지를 내밀었다.


간호학 교재를 세워두고 공부하던 여자분은

내 쪽지를 차분히 읽고는 조용한 몸짓으로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녀는 조용히 나에게 50원을 건넸고, 나는 조용히 90도로 인사를 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50원이 필요한데 100원이나 500원을 구걸하여 이문을 남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떳떳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지나간 작은 사건들에서 내가 선택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선택과 결정에도 기질이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대체 왜 그러니.”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들의 기질은 내가 물려준 것이기도 해서.    


기질은 원석이라는 말이 있다.

원석은 다듬으면 보석과 같이 되기도 하지만 끝내 원석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바로 나, 거의 원석).  

   


길을 가다 주인과 산책하는 강아지를 볼 때가 있다.

주인은 가자고 재촉하는데 강아지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다리를 세우고 쉬를 한다.

주인이 목줄을 잡아당기면 그때서야 제 길을 가고 그러다가 금세 작은 것에 호기심을 느껴 멈춘다.


나는 그런 강아지들을 보면 그 강아지가 내 본래 모습이나 내 기질 같고, 강아지 목줄을 당기는 견주는 나의 이성이나 사회성 같다는 생각을 한다.


충동적이고 산만한 나 자신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살아가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매일 나를 산책시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 내가 좋아하는 이환천 시인의 '자신'이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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