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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Mar 08. 2022

가장 힘들었던 증인신문 - 아동학대 사건

피고인은 50대 남자이고, 자녀 5명을 수시로 폭행하고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으로 기소되었다.

아이들에게 머리를 땅에 박고 열중쉬어 자세를 하도록 하거나 당구채로 때리거나 벽돌을 던지는 등의 행위가 기소 내용이었다. 신고자는 가출한 큰 딸이었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그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이 있어서 구속되지는 않았다. 피고인은 훈육 목적으로 꿀밤 정도를 때린 적은 있어도 당구채로 폭행하거나 다른 체벌은 한 사실이 없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 아동학대 사건의 항소심 국선변호인이었다.


그는 나와 상담을 할 때 부인을 데리고 왔다.

피해아동의 엄마이기도 한 그의 부인은 피고인 편을 들었으며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부부의 말에 의하면 자녀는 6명인데 큰 아이는 인격장애 등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집에서 함께 사는 자식은 5명인데 그중 3명은 절도와 성매매를 일삼으며 수시로 가출하는 비행청소년이라는 것이다.


그 3명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소년원에 있는 아이도 있었다. 이 부부는 자식들의 비행으로 인해 동네에서도 손가락질과 항의를 받는 생활을 했고 수시로 피해배상을 하고 아이들의 사고를 수습하는 등 괴롭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들이 아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노라고 했다.    


이어 피고인 부부는 아이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고 문제가 많은지에 대해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미성년 딸이 성매매를 하고 입금받은 돈이라면서 계좌 거래내역서를 뽑아왔다. 일정한 액수가 입금된 것이 빈번해서 성매매 대가로 의심이 되기는 했다. 딸의 성매매를 안지가 꽤 되었으며, 딸을 말리고 훈육했지만 딸이 부모의 말을 듣기는커녕 가출한 다음 아동학대로 신고했다는 것이다.


부부는 아동학대로 신고하면 부모와 분리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이용한다고 했다.


그 부부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오래전부터 성매매 사실을 알고 계셨다면서
왜 계좌를 정지시키지 않으셨지요?    


그들은 당황해했다.     


그 부부는 셋째 딸을 증인으로 신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아이들은 1심에서 증인으로 출석해서 피고인에게 맞은 사실을 증언했지만 셋째 딸에 대한 증인신문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 증언 내용을 번복하는 증언을 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피고인에게 유리할까 의문이 들어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피고인 부부는 큰 딸의 정신적인 지배를 받은 아이들이 위증을 했다고 주장했다. 셋째 딸은 현재 소년원에 있어서 자신들과 분리되어 있고 자신들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했다.

피고인은 셋째 딸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여주었다.


셋째 딸이 피고인 부부를 그리워하고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이제 같이 살아요, 그동안 미안했어요.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    


피고인 부부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증인신문을 강하게 요청하여 나는 피고인의 셋째 딸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부디 피고인의 말이 사실이고 진짜 피고인이 억울하기를 바랐다.    


재판부에서 증인신청을 받아주어서 그다음 기일에 셋째 딸의 증인신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증인신문 하기 며칠 전 피고인의 셋째 딸은 소년원에서 나왔다.    


증인 신문하는 날 법정 앞에서 나는 그 부부와 함께 있는 셋째 딸을 보았다.


소년원에서 나왔으니 이제 피고인 부부와 함께 살겠구나.. 그렇게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더니 지금은 좋을까 싶어서 피고인에게 물었다.


“따님이 집에 오니까 좋으시죠?”

그러자 피고인이 딸은 충청도에 있는 모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오늘 그 병원에서 데리고 왔다고 했다. 딸이 집에 와서 자꾸 자해를 해서 입원시켰노라고 했다.     


나는 피고인의 큰 아들도 몇 년째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피고인의 셋째 딸이 입원한 병원이 충청도라는 말에 의아했다.

자식을 입원시키려면 보통 집 가까이 입원시켜서 자주 들여다볼 텐데, 어째서 이 부부는 돈과 휴대폰이 없으면 걸어서도 집에 찾아올 수 없는 거리에 입원시킨 것일까.    


아이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피고인 부부에게 아이가 너무 긴장한 것 같으니 몇 가지 주의사항을 둘이 있으면서 알려주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피고인 부부가 허락해서 나는 아이를 피고인 부부와 떨어진 곳 의자로 데려갔다.    


“증언하기 싫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 왜 그랬어.”

살고 싶지 않아서요.


충청도에서 법정까지 아이를 데리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세뇌가 있었을까.

아이는 퇴원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부모의 사주로 위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아이라면 증인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고인은 증인신문을 원하고 있었다. 변호인은 직업윤리상 변론 중 피고인의 다른 범죄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 나는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선임된 변호인이므로 피고인의 잘못을 수사하듯이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최선은 아이가 솔직하게 말을 해서 피고인이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밝혀지고 그렇지 않다면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야지 내가 신청한 증인에게 위증의 우려가 있다면서 피고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증인신청을 철회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예정대로 증인신문은 진행되었고    

증인인 아이는 피고인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언을 했다.

언니와 동생들이 거짓말을 했고 자신들은 아빠로부터 폭행당한 사실이 없다고.

아이는 몸에도 눈에도 힘이 없이 말했다.    


묻는 나도 마음이 힘들었고, 아이도 힘들어 보였다.    


증인신문이 끝나고 법정 밖 복도에서는 피고인이 아이가 받은 증인 여비 봉투를 열어보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 피고인은 아이를 안아주며 고생했다고 얘기해주었다.

아빠에게 안긴 아이 눈에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아이에게 힘들었지..라고 말을 건넸고 부모는 먼 길 가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우리 둘을 남겨두고 각자 화장실에 갔다.    


붕대 감은 손을 무릎에 얹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몇 살이지?”

“열일곱 살이요.”    


자해하지 마. 성인 되려면 얼마 안 남았어. 무슨 뜻인지 알지.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이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손을 잡아 주었다.    


곧 아이가 스스로 휴대폰과 통장을 개설하고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때가 되겠지.


그렇게 홀로 설 수 있게 되면 새처럼 멀리멀리 날아가길 바랐다.    

    

선고 날이 되었다. 피고인은 여전히 유죄였다.

피고인이 폭행하지 않았다는 아이의 말을 재판부는 믿지 않은 것이다.    


피고인이 무죄가 되진 않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셋째 딸의 힘없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얼마 뒤 정신병원에서 셋째 딸을 만났다는 사회복지사가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피고인의 셋째 딸이 아동학대를 호소하는데, 사실을 확인하고 싶고 피고인에 대한 판결문도 보고 싶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셋째 딸을 학대한 보호자가 셋째 딸이 아동학대 때문에 자해하자 그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입원시킨 것인지 살피고 싶어 했다.


나는 피고인의 허락이 있어야 보내 줄 수 있다고 했다.

피고인이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피고인은 보내주지 않는 것이 더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판결문을 보내주라고 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그물망을 통과해서 떨어졌을 때

그 아래엔 또 다른 사람이 펼친 그물망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는 다른 그물망이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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