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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n 01. 2024

검찰 열람복사실에서 평온을 얻다.

나는 단순 작업을 좋아한다.

생각이 멈추기 때문이다.


예전에 잡초 뽑기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체력은 미약했지만

내가 뽑은 잡초 양은 진짜 창대했다.


오전 9시부터 자유롭게 시간을 정해서 잡초를 뽑으면 되고 오후 5시까지 하는 작업이었다.


다들 의욕적으로 왔다가 오전에 나가떨어지는데 나는 거의 로봇처럼 잡초를 제거했다.

무념무상.

온통 초록인 내 눈앞.

명상과 힐링이 따로 없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로지 잡초 뽑기에 몰입하고 나니

어깨가 빠질 것 같고 허리가 너무 아팠지만

마음만은 회춘한 것 같았다.


단순 작업이라고 해서 대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잡초와 잔디를 구분해야 하고, 잡초같이 생겼더라도 화초는 뽑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두뇌는 쓰되 단순 반복적이라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잡초 뽑을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는 정신건강 차원에서 봉투 붙이기나 인형 눈알 붙이기 같은 가내수공업을 틈틈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남자의 인형 눈알 붙이기(하남자도 작업 가능)
가족형 가내수공업 - 인형 눈알 붙이기

러나 인형 눈알 붙이기 부업은 이제 구하기가 어렵고

봉투는 전국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기회를 빼앗겼다.


나는 감정 변화 부분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재산은 별로 없지만 생각만큼은 내가 재벌.


평소 위와 같은 증상으로 늘 평온함을 추구하던 중

우리 사무실 여직원이 손가락이 아프게 되어 복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


나는 검찰 열람복사실에서 사건기록을 복사하게 되었다.

검찰 열람복사실에는 복사기가 10여 대 있고 모두 그 앞에 붙어서 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기록은 기록을 묶은 끈을 풀지 못하고 한 장 한 장 복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이 천 페이지면 기록을 천 번 넘기며 복사를 해야 한다.


증거서류가 유실되거나 페이지가 엉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복사기를 돌려놓고 기다리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다른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 사이에서 복사기 한대를 점령하고 복사를 시작했다.


한 장 넘기고 또 착.

넘기고 착. 넘기고 착.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너튜브에서 '웅장한 음악'을 검색했다.

장한 음악을 들으니 가슴도 웅장해졌다.

사건기록의 글자들은 게르만족이 로마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널리 사용하던 표의문자인 룬 문자로 보였다.


글래디에이터 ost를 반복해서 들으니

세계의 명운이 나에게 걸린 전투에 나가야 하는 장군이 된 느낌이 들었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각오))


형사사건 기록은 공소장이 제일 처음, 그다음에 증거목록, 그다음에 증거서류가 목록 순서대로 편철되어 있다.


증거서류의 끝은 범죄경력조회(전과 자료)가 붙어 있다. 범죄경력조회까지 이르면 그 기록의 복사가 끝나는 것이다.


한 장 넘기고 착. 넘기고 착. 넘기고 착.

반복하는 사이 글래디에이터 ost는 격렬한 전투에 이르고


복사할 마지막 서류인 범죄경력조회까지 이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검찰 열람복사실에 태극기를 꽂고 싶은 마음이 된다.

무한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그에 따라 같은 소리가 난다.

종이 넘기고 착. 복사되는 소리 징~

내가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쌓이게 되는 종이.

성취감도 있다.


이 복사할 때 웅장한 음악을 들었던 것이 좋아서

요즘은 화장실 청소 할 때에도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웅장한 음악을 검색해서 듣는다.


그럼 청소하러 화장실에 들어서는 마음이 다르다.

곰팡이, 이제 너희는 죽는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류현진-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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