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요즘 체크카드나 통장을 타인에게 주었다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로 형사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신용등급을 높이는 데에 필요하다거나 대출조건(담보목적 또는 대출원금과 이자 상환용도)이라고 하면서 체크카드나 통장을 보내라는 말에 속아서 보낸 경우다.
타인의 체크카드나 통장이 필요한 이유는 보이스피싱이나 도박 등 범죄수익금을 입출금 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무언가를 감당할 만한 그릇.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는데 주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사건 피고인들이 그렇다.
아무런 전과가 없는 70대 남성의 2심 재판을 변호하게 되었다. 그는 뇌경색으로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때 다리를 절었다. 그는 1심에서 3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전자금융거래법 위반도 동종전과가 있으면 징역형이 나온다), 체크카드와 통장을 빌려주면 대출을 해 준다는 말에 속아, 체크카드와 통장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그가 항소한 이유는 벌금을 납부할 능력이 되지 않아, 벌금 감액의 선처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업실패와 이혼 후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뇌졸중과 뇌경색으로 몸에 마비증세까지 있었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서 일은 하지 못했고, 고시원에 살면서 노령연금과 월남전 참전수당 같은 것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이혼 후에도 딸의 대학 입학금까지는 보내 주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어 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몇 달 전 거의 10년 만에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집을 가야 되는데 모아 둔 돈이 없으니 아버지가 혼수 좀 해 달라고.
그의 수중에 돈이 없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시집간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대출을 알아보았다. 직업도 수입도 없고 은행 잔고도 거의 없는, 병들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누가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겠나. 빌려준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는 대출을 알아보면서 자신의 연락처와 인적사항 등 개인정보를 여기저기 남겼다. 그리고 그의 개인정보는 보이스피싱을 하는 조직에 전달되었다. 돈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의 개인정보와 함께.
그리고 어느 날 대출이 가능하다는 금융기관의 연락을 받았다. 대출회사에서는 그에게, 대출을 받으려면 신용등급을 높이는 작업을 해야 하고 통장 잔고를 일시적으로 채워놓기 위해 통장과 체크카드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신속하게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서 대출업무담당자라는 사람에게 전달했다.
이후 대출을 해 준다는 사람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통장이 보이스피싱에 이용되었으니 출석하라고.
그가 나와 상담을 하던 날
“여길 버스 타고 오다 보니 우리 딸이 입학했던 대학교가 보이더라고요. 입학할 때 갔었는데..”라는 말을 했다.
“딸이 서른이 넘었다면서요. 형편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결혼을 해야지, 아버지도 이렇게 어려운데 혼수를 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는 “우리 딸도 변호사님처럼 생각해 준다면 감사한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딸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에요. 변호사님하고 우리 딸 하고는 사정이 다르지요.”라고 했다.
죄를 지었다고 형사법정에 선 사람이었지만, 그는 점잖고 차분했다. 이 사건 외에 평생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아마 그는 딸을 절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몇 달 전부터는 시로부터 ‘긴급생계비 지원’까지 받아서 생활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도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전화해준 것이 고맙고, 그래도 아버지라고 의지하는 딸의 연락에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무지로 인해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을 반성하지만 이 벌금은 다시 태어나도 마련하지 못할 돈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돈을 벌어보지 못하고 어려움 속에 있다 보니 다시 태어나도 300만 원을 벌 수 없을 것만 같았을까.
죄를 짓고도 벌금 300만 원쯤은 형벌이 아닌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벌금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2심에서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아달라고 사정했다.
난감했다. 피고인만 항소한 경우 항소심에서는 1심보다 중한 형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징역형에 집행유예는 벌금형보다 중한 형이라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니 피고인이 깜짝 놀랐다.
“네? 어째서 돈이 안 나가고 징역살이도 안 하는 집행유예가 벌금 300만 원보다 중한 형이라는 겁니까.”
“집행유예 기간에 죄를 저질러서 형을 받으면 외상으로 걸려 있는 징역형 살아야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징역형은 몸을 가두는 거니까 벌금형보다 중한 형이에요.”
“설령 징역살이를 해야 된다고 해도 그거는 내가 가진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형벌이지만 벌금은 내가 낼 수가 없는데.. 저는 이해가 안 되네요.”
그는 징역살이를 때울 ‘몸’이 있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징역형은 감당할 수 있고, 돈은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에 벌금형은 감당할 수 없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고 사람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돈으로 불행을 피할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다. 그에게 돈이 있었더라면, 법정에도 서지 않았을 것이고 딸의 혼수를 준비해주면서 다시 부녀간의 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