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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줌마라는 사실을 엄중히 인식하다.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해요.)

by 몬스테라

이 일 무렵 나는 30대 중반을 지났고 아이도 있었지만 내가 꽤 동안이고 쫌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나를 보면 결혼했다고 상상할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어쩌다 나를 실수로 아줌마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으면 나는 속으로 ‘뭐래..’ 그랬다.

꽤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나를 아줌마라고 불렀지만.


직장에서는 몬스테라 변호사나 몬변으로 불렸고 집에서는 남편이 몬스테라씨라고 불렀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강남에서 고층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다가 10층쯤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지 않았고, 비상벨을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밖에 사람의 기척이 없었고 비상벨은 여러 번 눌러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안 되더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 신호가 잡혔다. 나는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했다.

충격의 도가니에 빠질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남편은 엘리베이터에는 추락을 방지하는 많은 안전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추락할 우려가 없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남편은 내게 나에게 안심하라고 하면서, 비상벨을 눌러보라고 했다.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고 하니까 119에 연락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금 회의가 있어서 들어간다고 했다. 남편의 목소리는 너무 대수롭지 않았다.

내가 변기가 막혀서 전화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휴대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남편과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또 회의에 들어간다고 하니 통화할 수도 없고.


그때 119에서 전화가 왔다. 자세한 위치 파악을 위해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곧 도착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안심도 시켜 주었다. 이후 119에서 짧은 간격으로 문자가 왔다. 어디쯤 왔다는.


나는 남편보다 119 소방관들에게 더 큰 위안을 얻고 의지하고 있었다.


혼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머릿속으로 만에 하나 소방관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경우를 생각하게 되었다. ‘00동 소재 고층 오피스텔 엘리베이터가 추락해서 30대 여성..’이런 뉴스가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CCTV 카메라가 있었다.

오늘 내가 저세상으로 간다면, 엘리베이터 안의 추락 전 내 모습 영상이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
만약 엘리베이터 안의 내 모습이 뉴스에 온다면 콧구멍이나 후비고 있으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품위를 지키며 차분하게 구석에 기대 서 있었다.


지상은 10층이지만 지하가 5층까지 있다면 이건 15층에서 추락하는 건데..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차에 바깥에서 여기다 여기라고 하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안에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네!! 저 여기 있어요!!”라고 답했다.


엘리베이터 문 틈 사이로 쇠지렛대의 끝부분이 들어왔다. 문이 수동으로 개방된 뒤 여러 명의 소방관들이 보였다. 긴장이 풀어지고 안도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울먹이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런데 쇠지렛대를 들고 있는 소방관 한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아줌마! ” “아줌마! 아줌마 괜찮아요?!!”


이후 소방관 분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백번쯤은 아줌마라고 정중히 불렀던 것 같다.

음성변조한 아줌마 소리가 느린버전으로 귓가에 맴도는듯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아아주움마아아아아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아줌마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지? 아가씨라고 의심은 안 들었을까.

화산처럼 폭발하려던 내 눈물이 그 소방관 분 덕분에 잡혔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소방관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어서 00 지방변호사회에서 주관하는 순직 소방관 경찰 유자녀 장학금 지원사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감금죄를 저지른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


이 날 집에 가서는 남편에게 정말 상처 받았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설령 엘리베이터 안전장치에 대해서 신앙과도 같은 깊은 믿음이 있다고 해도, 내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떨고 있는데 왜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냐고..

남편은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왠지 서운하고 슬펐지만, 그래도 남편이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그렇게 차분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며칠 뒤 의뢰인인 모 건설회사 사장님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서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 갇힌 얘기를 들려주면서


“근데 사장님, 엘리베이터에는 수 십 가지의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서 추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라고 물었다.


전라도 태생이라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사장님이 뻥찐 얼굴로 답했다.

“누가 그래?? 추락하면 걍 디지는거여..”

“.....”


이후 나는 비가 오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그날의 엘리베이터 사건 얘기를 라디오를 틀어 놓은 것 마냥 반복하면서 남편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오빤 쏘시오패스라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면서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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