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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 처리하는 방법

by 몬스테라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것 같다.

일도 하기 싫고 보람이 없는 것 같고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직업이 원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니까

다소 거친 사람들을 만나도 이토록 힘들진 않았다.


나에게 까다로운 요구를 하거나

정신질환으로 인해 차마 내가 하기 부끄러운 망상 같은 주장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했으며, 부끄러움은 내 몫으로 논개처럼 안고, 법정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변론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이 싫어지고

자꾸 화가 나고

심장이 가슴에서 뛰는 게 아니라 배에서 뛰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 소파에 수달처럼 누워서 가만히 있을 때가 많았다.

브런치도 안 보게 되고

평소 재밌었던 것들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걷기도 싫고 음악도 틀기 싫고.

아 이런 게 화병인가 싶었다.


친한 언니가

우울증은 마음의 당뇨


이기 때문에 평생 매일 관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의 당뇨 정도가 아니라 마음 부전증이나 더 심각한 증상이었다.


을사오적 같은 피고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다소 부담이 있었는데,

강성인 몇몇 피고인들은 요구사항이 지나쳤다.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변호인이면서
피해자나 증인에게 모욕을 주는 증인신문이나 변론은 삼가고
최소한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도 하지 않으면서
피고인들이 변호사가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속상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니

그 중심을 잡는 일이 힘들었다.

그리고 아동학대사건 피고인을 접견 후

친권이 박탈되지 않는다면, 피해자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를 생각하다

그 피고인의 변론요지서를 좀처럼 쓰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차마 말하기 어려운, 질이 매우 좋지 않은 범행을 저질러 놓고

징역 몇 년을 받아 구속된 사람의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님, 우리 00 씨가 몇 년 동안 교도소에서 나쁜 사람들하고만 지내야 되는 거잖아요.

거긴 죄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거잖아요.”


평소라면 흐트러짐 없이 잘 응대했을 텐데

지병(화병)이 생겨서인지

“거기에 000 씨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라고 해버렸다.


나의 스트레스를 적절히 관리하고 사건과의 거리,

안전거리와 생명선을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써지지 않는 변론요지서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날이 많아지던 어느 날부터

나는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스케줄에 맞추어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 수업을 들었다.

[그리는 중인 미완성 모란과 완성 모란 화병]

커피를 옆에 두고 색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다 보니 집중도 되고 힐링이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려고 사물을 살피고 종이에 드러내는 과정은 다른 일을 잊고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된 것도 멀리서 보면 과감한 터치가 되어 그림을 살리는 것이 있고,

아주 사소한 실수인데 그림 전체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그림에 몰입해 있다가도

자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림 그리는 과정을 통해서도 느끼는 것이 많았다.

[그리는 중인 미완성 모란 리스와 완성 꽃나무]

천과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색을 올릴 때

아 이래서 수학 과학은 삶의 수단이고

예술은 삶의 목적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포슬린 아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만든 접시]


[포슬린 아트- 내가 만든 티팟 세트]

그때도 성취감을 느끼고 좋았지만,

패브릭과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오묘한, 그리고 원초적인 위안을 주었다.


집에 있는 아이의 스케치북 한 장을 빌려 사무실 바깥 풍경을 연필로 스케치해보고,

주말농장 텃밭에도 아이의 네임펜을 들고 가 눈에 보이는 들꽃을 그렸다.

그리고 새벽에 아파트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계단을 오르니 심장이 터질 듯 희열이 느껴지고 좋았다.

우리 집 앞에 커피와 생수를 두고,

계단을 오르다가 우리 층을 지날 때 마시고 가기도 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강의를 듣기도 하고 다 좋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역시 그냥 계단만 오르는 것이었다.

몸도 건강해지는 것 같고, 엉덩이가 업 되어서 등까지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쓰지 못하는 서면들이 있었지만

나는 PT를 받으며 근육을 키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트레이너는 내가 중량 높이는 것에 빨리 적응하고

특히 데드리프트는 자세도 좋고 잘한다며 칭찬해주었다.

데드리프트는 50킬로 무게로 드는데,

나는 어떤 특정 사건 변론요지서만 안 쓸 수 있다면

20킬로 더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도 매일 스쾃 100번과 플랭크 1분 3세트,

레그 레이즈와 아령운동을 했다.

열심히 운동하여 심신을 단련하겠다는 각오로.

[아령 보관장소가 된 화분 거치대]

많은 사건들이 종결되고 다시 신건을 받고 하는 와중에도

미제처럼 남은 사건들은 여전히 있었다.


나는 이제 요리에도 빠져서,

새벽에 요리 재료를 손질하면서 무념무상의 시간을 가지며 힐링하게 되었다.

생물재료를 손질할 때에는 생물들에게 가하는 요리의 폭력성에 대해서 생각하며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반찬 여러 가지를 뚝딱 해놓고 계단 오르기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고

점점 대장금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서면은 잘 안 써지지만 간장게장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말랭이 샐러드와 식용 꽃 샐러드 - 참깨소스]
[문어 카르파치오와 조개관자살 파스타]


그러다 어제,

거의 지명수배자처럼 쫒기 듯 시간이 임박해서

특정 사건의 증인신문사항과 변론요지서를 이제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밥을 먹고, 또 빵을 먹고, 토피넛 라테를 마시고, 또 초콜릿을 먹어도 당은 보충되지 않는 기분.


그래, 수산시장 대게집 메뉴판에 영문으로 적힌 대게 usually 처럼,
대충 살자.

이렇게 마음먹고 쓰니까 써졌다.


다 쓴 서면을 출력해서 들고 있으면서 깨달았다.


어떤 일을 잘하는 방법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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