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가 그랬듯 나도 독서실이라는 곳을 다녔다. 그다지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아닌데, 그때 그 시절의 분위기는 공부=독서실로 귀결되었었다.
여느 고등학생과 다름없이 나 역시 독서실에 등록했고 매일 하교후에 옷을 갈아입고 독서실로 향했다. 어두운 공간속에 내 책상과 불빛과 나 만이 세상의 전부인 듯한 그런 착각을 주는 느낌. 공부보다 그런 분위기와 안온함이 나를 감싸준다는 느낌을 얻으려고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자고 일어나면 이불이 다 젖듯 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더운 것도 아니었는데.... 이불이 축축할 정도로. 그리고 한 달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감기가 심해도 너무 심하네... 하는 마음으로 엄마와 함께 병원을 갔더랬다.
그곳에서 진단해준 병명은 다름아닌 폐결핵. 그것도 3기. 그냥 놔두면 죽는다며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에 연계해주었다. 내 기억에 대한적십자회 가 아닐까 싶다.
'12-13알 정도 되는 약을 매일 끼니 때마다 먹어야 하고 내성이 강한 약이기 때문에 한번 이라도 놓치면 절대 안된다. 이 약 외에는 치료약이 없고 내성이 생겨버리면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엄마와 넋을 놓은 사람처럼 집에 돌아오던 것을 기억한다.
엄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꽉 차 있음에도 울음을 꾹 참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약만 잘 먹으면 낫는다니까 걱정하지마. 약은 엄마가 잘 챙겨줄게.' 하셨다. 나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못하고 멍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을 매일매일 삼시세끼 엄마가 챙겨주는 그 약을 먹었다. 한 끼 분량씩 은박지에 소포장을 해서 아침에 챙겨주고, 점심에 도시락 가방에 넣어주고, 저녁 야자가 끝나고 귀가하면 또 챙겨주셔서 한 끼도 빠지지 않도록 재깍재깍 대령을 해주셨다. 전염성이 심한 병이었으나 다행히도 약을 먹기 시작하면 결핵균이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는 나갈 수 있었다.
이 약의 부작용은 체중저하와 어마어마한 졸음, 그리고 무릎통증이 동반되어 수업 중에는 늘 졸기 일쑤였고, 무릎이 너무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는데 체육 시간에 나는 당연히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열외자였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 친구들은 허가 받고 쉴 수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무릎 통증이 너무 심했던,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던 어느 날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직장에 조퇴신청을 하고 학교에 오셨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지, 택시가 지금처럼 흔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꽤 거리가 있었던 집까지 엄마는 다 큰 여고생인 나를 업고 걸으셨다. 나는 먼 길을 등에 업힌 채 엄마랑 도란도란 나누었던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고, 몸도 여리여리했는데 지금의 나보다 훨씬 단단했고, 성숙했던 것 같다.
너무 아파서 징징대던 나는 엄마 등에 업혀서 포근함과 안전감을 느꼈었다.
오늘 너무 무더워서 숨 쉬기가 힘들어 헥헥대고 있는데 그날의 엄마가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갑자기 너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