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몬스테라 Nov 25. 2022

내 안의 아이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지만, 집안 형편으로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던 엄마는 결핍 때문인지 야망이 많은 분이다. 허투른 행동도, 뒹굴거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투자를 한 만큼 결과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그게 자식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엄마에게 자식 셋 중 둘은 투자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자식들이었다. 몸이 약했던 언니와 남동생은 늘 부모의 걱정거리였다. 공부는커녕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남동생은 아들이라고 오냐오냐했던 탓인지 안하무인으로 자랐다. 내 형제들은 엄마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성취를 지향하는 엄마는 그것이 탐탁지 않았다.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욕망이 더욱 들끓었던 것 같다.      

  둘째인 나는 비록 원치 않던 딸이었지만 야무졌고, 똘똘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표정을 잘 읽었고, 씩씩했다. 엄마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춤추고 노래해서 기분을 좋게 해주었고, 아빠가 화가 난 것 같으면 어깨를 주물러 드리거나 애교스러운 장난을 쳐서 기분을 풀어주었다.      

  엄마가 언니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으면 어깨너머로 글자와 셈을 깨우쳤다. 나에겐 그게 놀이였다. 몸도 건강해서 웬만해선 잔병치레도 하지 않았고, 몸이 왜소한 남동생이 밖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나가서 싸워주고 패주었다. 약한 형제들에게 관심이 가 있는 부모가 나에게 쓸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부모의 관심을 끄는 방식을 깨우쳐갔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성적도 잘 받아왔고, 엄마의 욕심대로 학급 임원에 전교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말 맞다나 엄마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봐도 나는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넉넉하게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자식이라면 지원도 응원도 기꺼이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엄마 아빠는 나에게 인색했다. 밖에 나가서는 내세울 만한 자식이었지만, 나에 대한 투자에는 지갑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투자 대비 효율 좋은, 그저 과시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옷이든 가방이든 학생 시절에 갖고 싶은 아이템이 있을 때에도 고민하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공교롭게도 며칠 후 남동생은 나이*, 아디다* 브랜드의 가방, 옷을 들고 나타났다. 언니는 큰 딸이니까 그에 맞게 괜찮은 옷을 갖춰 입혀야 했던지 철철이 새 옷을 입었다. 난 언니가 물려주는 옷, 남동생이 질려하는 가방을 갖게 되는 일이 많았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언니에게, 남동생에게는 각자 타고 다닐 작은 차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학교가 멀었고 차가 따로 필요없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사주지 않았다. 필요할 때 사주마  약속했으나, 직장을 구하고 차가 필요할 때가 되니 이제는 네 능력으로 살 수 있지 않느냐 하며 사주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온수매트가 전국을 휩쓸던 때, 아빠가 큰 돈을 들여 온수매트 3장을 사셨다. 무슨 날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온 가족이 다 모여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던 그때 택배 벨이 울렸다. 택배 기사님이 배달해주신 온수매트 3장을 보고 새로운 물건을 쓸 설레임에 들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이 매트는 언니네랑, 동생네, 그리고 하나는 엄마 아빠가 쓸거야.”     

  이 이야기를 듣고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도대체 나에게만 유독 야박하게 구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서럽고 북받쳐서 일찍 집에 돌아와 버렸다. 나에게 원한이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나를 어디서 데려 온건가? 낳고 싶지 않은 자식이었나? 설사 그렇대도 이렇게 오랜 시간 차별할 수가 있나?      

    도대체 내건 왜 안 사주는 거냐고. 안 사줄거면 다 사지 말고, 사줄거면 공평하게 다 사주지. 이게 뭐냐고 소리를 질렀었다. 

  ‘도대체 내가 엄마 아빠한테는 뭔데???’

그때 아빠는 말씀하셨다.

  ‘넌 네가 알아서 다 잘하잖아. 너는 걱정이 안되어서 그런다.’였다.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내 맘속에는 큰 상처로 남아있다.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되었어도 엄마에게 서운하다.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방관자처럼 보고만 있었던 아빠에 대해서도 원망이 크다. 어쩜 아빠가 우두머리고 엄마가 행동대장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자식을 보면 안쓰럽고, 더 다독여주고 싶을 만도 한데 우리 엄마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더 잘하지 못한다고 채찍질을 가했을망정. 부모에게 나는 그저 자랑의 도구였을까?     

  한동안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서운함이 자란 내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 마음속에 퇴적물이 쌓이든 차곡차곡 쌓여서 굳어갔다.      

  엄마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딸의 역할은 나름 톡톡히 한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보상을 바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다른 형제들과 같은 양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난 늘 관심 밖의 외로운 아이였다.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는 참 무신경하다. 그냥 알아서 잘 클 들풀 같은 자식이라고 설정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자식 중 한 명이 들풀같이 알아서 커 주면 땡큐일 것 같긴 하다. 내 자식들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들인데...     

  여전히 내 마음에는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해 외로운 아이가 살고 있다. 자꾸 주위를 기웃기웃거리며 마음을 나눌 상대를 찾고 있는 이유가 그 아이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잘 자라 성장해서 내 마음에서 독립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그 아이를 달래고 있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혹시 나도 꼰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