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날씨가 맑다. 넉살 좋은 바람이 햇살을 비집고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마주하고 있는 산 아래, 아이들의 교실이 보인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학교에서 우리 집이 보였다. 생각 없이 복도를 지나다가, 운동장에서 오징어 달구지를 하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멀리 집이 있었다. 작지만 우직하게 서 있는 집을 바라보면 어쩐지 안심이 되고,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 집은 가파른 골목을 올라야 도착하던 언덕배기에 있었다. 마당에는 석류나무가 자랐는데 가을이면 통통하게 익은 열매를 따려고 동네 아이들이 담을 올랐다. 그러면 나는 물뿌리개를 들고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공격을 했다. 어렵사리 사수한 열매를 따서 뿌듯하게 쪼개면 빼곡히 박힌 보석 모양의 과육들이 반짝였다. 나는 마루에 누워 한 알 한 알 음미하는 것으로, 승리한 자의 여유를 맛보았다. 정말이지 계절마다 살아남아 꽃을 피우던 나무 덕분에 석류라면 원 없이 먹었다.
그 나무가 우리 집의 자랑거리 기는 했지만, 나의 최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래되다 못해 겉이 반질거리고 거멓게 된 마루였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더 좋았다. 나갈 순 없어도 마루에 누워있으면 밖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까불대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는 것도, 그 소리를 듣는 것도 마냥 좋았다. 마루는 전과를 펴놓고 산수 문제의 답을 베껴 갈 때도 친구들과 종이 인형 놀이를 할 때도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같은 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만만하게 뒹굴 수 있었던 나의 놀이터였다.
집 뒤편에는 탱자나무가 자랐다. 가시가 있는 나무는 도둑을 쫓는 울타리로 제격이었다. 한 번은 ‘사랑이 꽃 피는 나무’를 보고 있는데, 윗길을 지나던 동네 오빠가 발을 헛디뎌 가시덤불로 떨어졌다. 쿵 소리에 온 가족이 달려갔더니, 오빠는 멀쩡히 불사조처럼 걸어 나왔다. 탱자나무로 맞아보니 별이 튈 만큼 아프던데, 한동안 오빠가 초능력자일지도 모른다며 소곤대고 다녔다.
집에서는 베스라는 영어 이름의 진돗개를 키웠다. 할머니는 베스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미스코리아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가족들은 베스를 족보 있는 개라며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녀석이 낳은 새끼들은 모두 잡종으로 태어났다. 나는 그중에서 찰떡을 닮은, 뽀얗고 동글한 막내가 제일 좋았다. 할머니 몰래 이불속에서 놀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데려가 손을 타게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짧은 꼬리를 흔들며 깡총대던 막내인데, 그날은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잠시 나를 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수의사 선생님은 한참 이갈이를 할 때라 무언가 잘 못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막내는 지어온 약을 다 먹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이~ 만남으은~ 우연이이이 아니야아~”
마침 가요 톱텐의 1위 곡이 노사연의 ‘만남’이라니.. 우리를 닮은 가사들이 가슴을 찔러댔다.
베스와 꼬마들 말고도 우리 집 밥을 먹는 동물이 또 있었다. 할머니가 살찌니라 부르던 노란 줄무늬 고양이. 주인도 없이 한량처럼 동네를 누비다가 출출해지면 챙겨놓은 그릇을 비우고 갔다. 때때로 날벌레를 잡느라 꽃밭 위를 지근거려 혼이 나기도 했지만,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할머니는 “살찌나아~”하고 찾아 나섰다. 나는 살찌니가 꽃밭에 다리를 쭈욱 펴고, 햇살을 쬐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측량기구를 들고 동네를 드나들던 아저씨들이, 마루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몇 식구가 사는지, 집은 자가인지,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의 개수는 몇 개인지 물었다. 곧 도로가 생긴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동네로 이사를 했다.
나는 종종 텅 빈 동네를 올라 마루에 앉아있다가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던 하늘은 그대로인데 곧 집이 사라진다니 갈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손을 흔들어 맞이해 주던 석류나무와, 쌀쌀맞은 가시를 삐죽 대던 탱자나무도 이제 안녕이었다. 베스와 꼬마들은 마당이 없는 주택에서는 살 수가 없기에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어도 꽃밭을 뒹굴던 살찌니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것 하나 추억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마루에 누워 눈물을 몇 번 훔치고는 쓰러져가는 동네를 뒤로하고, 내려온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남편이 어릴 적 살던 동네는 경주의 황리단길이라, 옛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서운하지 않냐고 묻는 내게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올 때마다 그대로라서, 오히려 걱정이었어”
변해버린 것을 슬퍼하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다 애정이구나. 모양은 다르지만 나를 보듬어주고 성장시킨 공간을, 우리는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석류나무집은 기꺼이 달려가는 곳이다. 그렇게 두 팔을 벌려 안아주던 집의 기억 덕분에 나는 단단하게 자랄 수 있었다. 마음 안에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앨범이 있다면 학교에서 바라보던 우리 집의 풍경을 맨 앞장에 챙겨 넣을 것이다.
어릴 적 고무줄놀이를 하며 뛰어놀던 마당 위로 버스가 달린다. 만질 수는 없지만,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다. 집에 대한 따뜻한 조각들을 꺼내어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곁을 떠날 아이들에게도 다정하게 닿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