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 왔어. 여기는 몇 번을 와도 낯설다. 큰아버지랑 나랑 김서방이랑 또 뺑뺑이를 돌았어. 오늘도 내 결혼식 때 지어 입은 한복을 입고 아이같이 웃고 있네. 귀여운 우리 할매. 사진 밑에 쓰인 내 이름이 마음에 든다. 새삼 멘트도 딱 좋아.
<사랑하는 어머니. 걱정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할머니의 이웃들을 보다가 웃음이 나와버렸어. 할머니는 불교인데 왼쪽에는 기독교, 오른쪽에는 천주교 신자가 있는 거야. 셋이서 종교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상상이 됐어. 할머니 칸에는 이제 빈방이 없네. 생각해 보면 나도, 사진 한 장으로 남을 날이 틀림없이 올 텐데 이곳에 와서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실감하곤 해. 지금도 죽는 날을 향해 가고 있잖아. 얄팍하게도 여기 있는 분들이 대부분 노인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뱉었어. 어라? 그런데 어린 학생이 활짝 웃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99년생이래.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하고 왔는데 울컥 눈물이 고였어.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니, 내가 ‘살아가는 일’을 많이 좋아하고 있더라고.
지우 낳고였나.. 마감시간을 앞두고 사람이 드문 마트를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예정에 없던 물품을 바구니에 막 담았거든? 그때 처음으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끽해야 과자 나부랭이들이지만 이 정도는 몇 봉지를 더 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그걸로 충분히 근사한 인생 같더라고. 언제나 삶은 견뎌봐도 좋을 만큼 가치 있고, 굉장한 일이라고 새기며 살고 있어. 그런 마음을 갖게 해 준 사람이 할머니야. 할머니는 온몸이 앙상해지고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삶을 내게 다 쓰고 갔으니까. 삼시 세끼를 꼬박 챙기고, 계절과일과 우유를 떨어트리지 않고, 밤새 걷어차는 이불을 덮어주고, 찬바람이 불면 인삼을 달이고,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 학교로 오던 사람. 새벽마다 아픈 무릎을 붙들고 기도했던 것도 알아. 그래서 지금도 절에 갈 때마다 대답도 없는 부처를 향해 수없이 엎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코가 시큰해. 할머니가 홀로 부엌에서 눈물을 훔치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문을 열어젖힌 내게 “와. 과자사물끼가” 하며 100원을 내밀던 날이 가끔 생각나. 할머니가 삼킨 눈물을 다 합치면 낙동강만큼은 될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배알도 없이 웃고 다니던 아이였지. 할머니는 나 때문에 주름이 지고 또 졌는데, 나는 할머니 덕분에 마음에 주름 하나 없이 자랐어. 할머니가 없었다면 이런 감사함도 모르고 살았을 거야.
그나저나 여기는 최첨단이야. 제례실 예약을 하면 몇 번 방으로 가라고 번호가 뜨는 거야. 28번을 찾아왔더니 티브이 화면에 할머니 얼굴이 떠있어. 너무 재밌지? 가족끼리 쓰는 대신 20분만 사용할 수 있데. 집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가지고 왔는데 꺼내기도 전에 후회가 된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요플레를 못 사 왔어. 동그랑땡이며 황태포며 할머니랑 거리가 먼 것들인데 뭐 하러 형식을 따졌나 모르겠어. 쟁반에 담고 보니 사과가 너무 작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쪼깬한 할머니랑 닮았으니까 괜찮지?! 할머니는 술도 안 마셨는데 소주를 따르고, 할머니한테 절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데 절을 했어. 할머니와 나는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런 낯선 일을 하고 있으니까 꼭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밑으로 퇴실 10분 전을 알리는 멘트가, 찬물을 끼얹으며 지나가고 있어. 요즘은 죄다 빨리빨리라 추억을 더듬을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아.
“할머니 나 간다. 또 올게”
오늘은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도 따뜻하고 좋으네. 할머니가 배웅 나오려고 그런 건가. 신발을 신고 사진을 보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어서 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 오늘도 내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한참 손을 흔들고 있을 거지?!...
여기 야외에도 봉안당이 있네. 왜 저 사람들은 밖에다 신청을 했을까 했더니 김서방이 I들은 실내에, E들은 실외에 있는 거라면서 나는 역마살 친구 배마살이니까 꼭 밖에 설치를 해주겠데. 그래서 싫다고 했어. 비 오고 바람 불면 춥잖아. 할머니가 있는 2층은 볕이 따뜻하게 들어서 다행이야.
할머니가 이곳에 온 지 9년이 흘렀데.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몰라. 문득문득 할머니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 길에서 조막만 한 할머니가 쫑쫑거리며 지나갈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쉬지 않고 말을 걸어올 때, 함께했던 곳들을 가거나 할머니가 좋아하던 꽃이 필 때..
아직도 요양원으로 가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사는 날까지 그렇겠지.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할머니를 생각하면 잔소리를 해대던 모습을 떠올려도 웃음이 나. 할머니도 나를 생각하면 그럴 거라고 믿어.
아이들은 개학해서 데리고 오지 못했어. 다음번에는 꼭 같이 올게. 할머니한테 로또 당첨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하니 철없는 손녀라고 김서방이 머라 해. 할머니는 늘 마지못하는 척 들어주던 사람이니까 기대해 봐도 되겠지?! 옆집 할머니들이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 진짜로 간다. 큰아버지랑 김서방이랑 꼬막정식 먹으러 갈 거다.